제1차 세계대전 정보

제1차 세계대전 정보

연합군 초록색, 동맹군 주황색, 연분홍색은 중립국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정보
시기 1914년 7월 28일 ~ 1918년 11월 11일(4년 3개월 14일)
연합군 동맹군
사망(군 병력) 5,525,000명 4,386,000명
부상(군 병력) 12,831,500명 8,388,000명
실종 4,121,000명 3,629,000명
총 사상자 22,477,500명 16,403,000명
연합/동맹군 병력
연합군 동맹군
러시아 제국 12,000,000명 독일 제국 13,250,000명
영국 8,841,541명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7,800,000명
프랑스 제3공화국 8,660,000명 오스만 제국 2,998,321명
이탈리아 왕국 5,615,140명 불가리아 왕국 1,200,000명
미국 4,743,826명
루마니아 왕국 1,234,000명
일본 제국 800,000명
세르비아 왕국 707,343명
벨기에 380,000명
그리스 왕국 250,000명
연합군 총 병력 42,959,850명 동맹군 총 병력 25,248,321명

1. 개요

“모든 전쟁을 끝낼 전쟁”에 육천 만 이상의 병사가 싸웠지만, 변한 건 없었습니다. -배틀필드1

World War I 1914년 7월 28일.[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왕국의 전쟁으로 촉발되어 1918년 11월 11일까지 전개된 전쟁이다.

전쟁에 관련된 국가들의 숫자만으로도 35개국이 관련됨으로서 이전의 그 어떤 전쟁보다도 대규모의 전쟁이었으며 전 세계로 전장이 확대된 최초의 전쟁이었기 때문에 세계 대전이란 이름이 붙었다. 세계 대전이란 명칭은 그 당시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지금도 ‘The Great War’는 제1차 세계 대전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다.[2] 물론 18세기 유럽은 늘 전쟁이었으며 특히 7년 전쟁과 프랑스 혁명의 나폴레옹 전쟁도 대규모에 전장은 컸지만, 빈 회의 이후로 약 100년간 유럽 열강들 간의 전투는 크림 전쟁, 보오전쟁, 보불전쟁이 전부라서 더욱 충격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제 1차 세계 대전과 제 2차 세계 대전 사이의 기간을 전간기라고 칭한다. 전 계층이 전쟁에 참가하였으므로 인민전쟁(People’s War)이라고도 한다. 전쟁 기간 동안 발생한 전사자는 약 990만 명이며 학자에 따라서는 이 전쟁에 참가한 국가들 대부분이 제국주의 국가라는 것을 지적해 제국주의 국가들의 전쟁이라는 제국전쟁(Imperial War)이라고도 부른다. 당장 프랑스, 독일, 영국, 러시아, 오스만, 이탈리아, 일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만 봐도 이미 답은 나온다. 이 전쟁으로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이 몰락하고 나머지 대영제국, 프랑스 식민제국들도 역사의 주도권을 사실상 상실하는 등 제국주의가 몰락했다.

인문학적으로도 중요한 시기였는데 (식민지 지역 같은) 야만에서 벗어난 문명국을 자처하던 유럽이 그 어떤 야만인들보다 더 끔찍한 전쟁을 벌였던 것에 대해서 그들 스스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이후 급속도로 발전하는 문명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으로 낙관하던 분위기(벨 에포크 같은)는 문명의 이기들을 이용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통해 박살이 나고 만다. 낭만적인 생각을 가지고 전쟁에 자원하던 유럽의 젊은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생지옥이었으며 1차 대전 이후로 유럽 문화는 상당 부분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분위기가 흐른다.[3]

군주정을 끝낸 전쟁이라고도 하는데, 이미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에 유럽 바깥의 나라들의 군주정은 식민지배[4]나 내부 소요[5]로 무너지고 있었고 그나마 건재하던 유럽의 군주정들도[6] 이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 4개의 제국이 망해 버리고 잠시 세워졌던 핀란드 왕국이나 독일 제국 내부의 수많은 제후국들의 왕정이 폐지되고 10여 개의 신생 공화국이 제국의 폐허 위에 세워지면서 20세기 왕정의 몰락의 신호탄을 울린 전쟁이기도 하다. 이후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알바니아의 왕정도 폐지되어 버림으로 유럽의 왕정은 서유럽의 일부 국가[7]를 제외하곤 무너진다.[8]

일반인들은 제2차 세계 대전에 비해 인지도나 관심이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2차 세계 대전의 경우 전쟁의 규모부터 크고 극적인 면들이 많았던 데 비해 1차 세계 대전은 전쟁 초기 1년 동안만 마른 전투, 탄넨베르크 전투 등 점령과 방어등이 일어났지 나머지 3년간은 참호에서 밀고 당기고만 하는 소모전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9]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더욱 더 심한데 왜냐하면 1차 때는 대부분의 전투가 유럽에서 일어났고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독일의 북양함대를 박살내고 고작 칭다오를 빼앗은 것밖에 없었던 반면에 2차 때는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등 아시아에서도 대규모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전쟁사학자나 국제정치학자들은 2차 대전보다 1차 대전을 더 중요한 연구 주제로 간주한다. 2차 대전은 개전의 원인이나 직전의 국제 구조, 전후 처리 등이 비교적 명확한 전쟁인 데 반해 1차 대전은 아직까지도 여러 가지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여지가 많으며 그만큼 논쟁도 많고 최초의 현대적 총력전(total war)의 사례이기 때문이다.

2. 참전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1914년 7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에 대한 對세르비아 최후통첩이 거부되자 세르비아에다 선전포고를 했다.
세르비아 왕국 1914년 7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을 거부하여 침공을 당했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전쟁으로 뛰어들었다.
러시아 제국 1914년 8월 2일 같은 슬라브 국가이며 후견국이기도 했던 러시아에게 세르비아는 발칸 전쟁의 영향으로 더욱 중요성이 커졌고,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침공하자 러시아는 즉시 총동원령을 선포하였으며 이를 해제하라는 독일의 요구를 거부하자 독일의 선전포고를 받게된다.
독일 제국 1914년 8월 2일 러시아가 세르비아 지원을 위해서 총동원령을 선포하자, 삼국 동맹에 의거하여 동맹국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기 위해서 러시아에다 선전포고를 한다.
프랑스 제3공화국 1914년 8월 3일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한 독일이 슐리펜 계획을 발동시키며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한다. 물론, 프랑스도 삼국협상에 의해 대독전 준비를 하고있었다.
벨기에 1914년 8월 3일 슐리펜 계획을 발동시킨 독일군이 벨기에 영토를 통과하려는 것을 벨기에군이 거부, 끝내 영토통과 승인을 받지 못하게 되자 독일은 벨기에의 중립을 무시하고 침략한다.
영국 1914년 8월 4일 삼국 협상에도 불구하고 중립을 지키려던 영국이었지만, 독일이 벨기에의 중립을 무시하고 침략을 하자 이를 이유로 8월 4일 독일에 선전포고한다.
몬테네그로 왕국 1914년 8월 5일 발칸반도 남부의 소왕국이었던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와 언어, 문화, 종교적 동질성 및 오스트리아에 대한 강한 반감 등으로 인해 세르비아를 지지한다.
일본 제국 1914년 8월 23일 영국의 동맹국이었던 일본은 영일동맹의 의무를 들어 독일에 선전포고한다. 그러나 애당초 영일동맹은 러시아의 남진에 대항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그저 핑계에 불과했고, 일본은 독일 본토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고립된 독일의 아시아-태평양 식민지를 노리고 참전한 것이다. 실제 일본은 제발 병력 좀 보내달라는 영-프의 요청을 무시하고 강 건너 불구경만 했다. 개전 직후 독일에서는 일본이 동맹군에 참전했다는 헛소문이 돌아서 잠시 일본에게 열광했다고…
오스만 제국 1914년 11월 1일 영국 해군성 장관 윈스턴 처칠이 오스만이 주문한 신조 전함 2척을 먹튀를 하자 반영여론이 대폭발. 반대로 피할 곳이 없어서 오스만으로 도망친 독일해군 지중해전대 소속 순양전함을 공짜로 준다는 빌헬름 2세의 선언에 친독 여론이 세진다. 그래도 정부는 중립 입장을 견지했으나, 이스마일 엔베르의 독단과 오스만 깃발을 단 독일 해군의 흑해 러시아 항구 공격으로 인해 결국 세계대전에 휩싸이게 된다.
아시르 이드리드 토후국[10] 1915년 5월 사이 영국의 전쟁수행에 합류
이탈리아 왕국 1915년 5월 23일 본래 삼국 동맹의 일원이었으나, 대전 직후에는 그 의무를 내팽개치고 중립을 선언[11]했다. 이후 전황의 이해득실을 따지면서 연합국의 승리가 유력하다고 판단[12][13], 말을 갈아타고 오스트리아에다 선전포고를 한다.
불가리아 왕국 1915년 10월 14일 본래 친 러시아, 반 오스만 국가였으나 제2차 발칸전쟁의 패배에 따른 원한을 갚기 위해서 세르비아에다 선전포고를 하면서 동맹국에 가담했다.
네지드 하사 토후국[14] 1915년 12월 16일 영국과의 다린 조약에 따라 오스만 제국과 전쟁개시
포르투갈 1916년 3월 9일 포르투갈 왕정복고전쟁 이후 수백여 년간 영국의 전통적인 우방이었던 포르투갈은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했으나 영국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16년 2월 말엽부터 자국 령에 들어오거나 항행중인 독일 선박들을 나포하고 화물을 압류했다. 당연히 이에 격분한 독일이 포르투갈에다 선전포고를 한다.
루마니아 왕국 1916년 8월 27일 3년여 동안 중립을 지켜온 루마니아는 남쪽 불가리아의 위협, 동부전선에서 계속 죽을 쑤는 오스트리아.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점차 동맹국에 불리해지는 전황 등을 토대로 전리품 획득을 위해서 늦게나마 참전을 결정하고 브루실로프 공세를 틈타서 오스트리아에다 선전포고를 한다. 그리고 겨우 1년 만에 독일군에게 본토를 다 털리고 항복한다. 다만 전쟁 종료 후에는 승전국으로 영토가 2배로 늘어나는 대박을 쳤다.
미국 1917년 4월 6일 의외로 친독, 반영 세력도 많았으며[15] 무엇보다 먼로 독트린 때문에 유럽의 전쟁에 참여할 수 없어 유럽 국가들이 싸우든지 말든지 우리와는 상관없고 그냥 돈이나 벌자는 태도였다. 그러나, 독일의 U-Boat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영국 상선 루시타니아 호가 격침되어 미국인들이 휘말려서 죽게 되자 대독감정이 악화되었으며, 테러가 벌어지고,[16]심지어 독일이 멕시코를 꼬드겨서 미국을 공격하려 했다는 내용의 치머만 전보가 공개되자 미국 국내의 여론이 대폭발하게 되면서 마침내 연합국으로서 참전을 선언한다. 하지만, 이런 여론악화의 이면에는 그동안 영국과 프랑스에게 돈을 빌려주고 외상으로 물건을 제공했던 미국의 자본가들이 영국 & 프랑스가 세계대전에서 패배하면 빌려준 돈을 못 돌려받을까봐(…) 우려했던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쿠바 1917년 4월 7일 미국의 전쟁수행에 합류
그리스 왕국 1917년 7월 2일 발칸 전선에서 세르비아가 신나게 털리자 그리스는 세르비아가 무너지면 오스트리아가 그리스까지 남하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영국 & 프랑스도 세르비아가 항복을 하게 되면, 발칸 전선의 추축 군이 다른 전선(특히 서부전선)으로 재배치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국가안보가 위험할 것을 우려하여 그리스에 지원을 약속, 그리스도 전쟁에 참전한다. 사실 참전하기 이전부터 이미 연합군 편이었다. 원수 지간이었던 오스만 제국이 동맹국 측인데다 세르비아가 전국토를 오스트리아한테 유린당하고 후퇴한 곳이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 지역이었고 동맹국 보호를 위해 이 일대에 영국과 프랑스군이 파병되었는데 이걸 그대로 냅뒀다.
태국 1917년 7월 22일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선전포고를 하였으며 서부 전선에 1284명의 병력을 파견하였다.
중국 1917년 8월 14일 제3혁명과 위안스카이 사망으로 공화국이 된 중국은 독일로부터 빼앗긴 이권을 다시 되찾고, 새 국가 건설에서 세계열강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연합국으로 가담한다.[17] 그러나 독일의 이권은 개전 첫 해에 이미 일본이 꿀꺽한 뒤였고, 중국의 말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18]
브라질 1917년 10월 26일 공식적으로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따른 피해, 그에 따른 반독여론 증가였지만…. 브라질은 당시 세계 커피생산량의 90% 이상을 독점하는 커피 플랜테이션 국가였는데, 1차 대전 직후 동맹국에 대한 해상봉쇄로 커피판로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면서 망했어요. 이후, 미국과 영국이 “커피재고 우리가 다 사줄 테니까 독일에다 선전포고해라.”라면서 제안을 했고 브라질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외에도 라이베리아, 파나마, 쿠바, 과테말라,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아이티, 온두라스, 에콰도르가 연합국에 속해 있었지만 그냥 미국이 선전포고를 하니까 따라서 하거나 형식상으로만 선전포고를 한 경우로 기껏해야 미국의 전쟁수행에 합류한 수준이다.

위의 목록 외에도 연합국에 합류한 국가들이 더 있는데 대표적으로 안도라, 네팔, 산마리노, 모나코 등이 있는데 제대로된 활동을 하지 않았고 그나마 네팔의 경우 수십명의 병력을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 또 영국의 식민지 또는 보호령이었던 캐나다, 인도, 뉴펀들랜드 자치령,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연방, 로디지아, 몰타 등등도 전쟁에 합류했다. 또 국가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의용군이 싸운 곳으로는 아르메니아, 폴란드, 헤자즈 왕국, 체코슬로바키아[19] 등이 있다.

기타 동맹국에는 다르푸르 술탄국, 데르비시 국[20], 자발 샴미르 토후국,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등이 있으나 선전포고 시기가 모호하며 폴란드나 리투아니아도 잠시 독일에 의해 점령되어 동맹국이었던 시절은 있으나 어디까지나 강제 점령이었으므로 제외한다.

2.1. 중립국

도중에 중립이 침범 받고 태도를 바꾼 나라들은 기재되지 않는다.

  • 덴마크
  • 스웨덴
  • 노르웨이
  • 스위스
  • 네덜란드
  • 스페인

전쟁의 주 무대가 중부 유럽인 만큼 북해와 발트해 너머의 북유럽쪽 국가들이 주로 중립국임을 표방했음을 알 수 있다.

3. 원인

  • 아래의 내용은 그나마 단순화하면 그렇다는 거고, 사실 전쟁은 크게는 일련의 유럽내 외교적 동맹 변화(세력 균형 변화)에 의해 일어났다. 전쟁의 복잡한 배경, 특히 발칸반도의 배경은 제1차 세계 대전/배경을 참조할 것

제1차 세계 대전의 기원은 팽창된 유럽 때문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산업혁명과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유럽의 생산력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급성장했다(벨 에포크 시대). 이런 상황에서 산업에 필요한 자원을 얻고 생산된 상품을 판매할 식민지가 필요하게 되어 유럽 각국은 식민지 쟁탈전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일찌감치 산업혁명을 성공시키고 국내 정치가 안정되어 있던 영국은 우위에 서있는 해군력 등을 바탕으로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보유했고 프랑스도 여기에 가세했다.

그에 비해 보불전쟁으로 통해 새로 떠오른 신흥 강국 독일 제국은 통일전쟁을 거치면서 영국, 프랑스에 비해 산업과 공업 발달 과정이 늦어졌고 이 때문에 뒤늦게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고 보니 이미 알짜배기들은 영국, 프랑스 등이 차지한 상태였다. 결국 독일이 식민지를 획득할 방법은 영국, 프랑스의 식민지를 뺏는 것 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독일은 기존 식민국가인 영국, 프랑스와 대립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으로 가장 크게 지적되고 있다.[21] 특히 빌헬름 2세는 이를 위해 영국 해군에 맞서 해군 증강 계획을 추진했는데, 이것은 영국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렸다.[22]

이미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도 독일과 영국, 프랑스의 대립은 위험수위에 달해 있었다. 영국이 남아프리카에서 네덜란드계 보어인들과 싸운 보어전쟁에도 보어인들의 배후에 독일이 있었고, 프랑스와는 두 차례에 걸친 모로코 사건으로 대립하는 상황이었다.

한편 식민지와는 인연이 없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범게르만주의와 러시아 제국의 범슬라브주의로 인한 발칸 반도를 둘러싼 갈등도 전쟁의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발칸 반도는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하게 되었는데, 독립 이후 발칸 반도의 각국은 발칸 전쟁 등 영토를 놓고 치열하게 싸운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발칸 반도의 슬라브족을 선동하여 지중해로의 진출을 노리던 러시아와 이를 견제하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불만을 품은 것은 세르비아로,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보스니아를 합병하고 러시아가 독일의 압력으로 이에 굴복하자 (1878년, 1908년)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에 극렬한 적대감을 품게 된다. 세르비아의 적대감은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세르비아 비밀결사 ‘검은 손’과 연계된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암살하는 사건으로 발전했고,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방아쇠를 당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바로 사라예보 사건이다.[23]

하지만 이것만으로 대 전쟁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애당초 오스트리아는 이 사건과 관련 세르비아 측에 검은 손의 해체 및 처벌과 내정간섭 허용만을 요구했기 때문.[24] 진짜 원인은 러시아가 영-불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 그래서 명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노련한 감각으로 유지하던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삼각동맹체제를 빌헬름 2세가 파기해 버린 것이 독일의 결정적 실책으로 꼽힌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러시아가 동맹을 맺어 포위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사이가 좋지 않던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를 잘 구워삶아 삼각동맹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빌헬름 2세 즉위 후, 노 재상 비스마르크를 강제로 은퇴시키고 외교체제를 개편하면서 러시아를 버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유일한 동맹 파트너로 선택한다. 이에 러시아는 당연히 (서로 고립된) 프랑스와 연합하며(1894년) 독일은 전략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  영국 역시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가 충분히 약화되었다고 보고 1907년 동맹을 맺는다.

이에 따라 독일은 이러한 전략적 약점을 전술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먼저 프랑스를 치고 나중에 러시아를 손본다!”는 슐리펜 계획을 구상한다. 결국 슐리펜 계획 자체가 1차 대전 개전 원인의 일부가 됐으니 1차 세계 대전 개전의 가장 큰 책임은 독일의 빌헬름 2세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4. 발발 과정 – 7월 위기

제1차 세계 대전 개전 과정의 막장스러움은 꽤 유명해서 외교사나 국제관계사에도 단골로 소개된다. 그리고 이렇게 했는데도 전쟁이 터진 건 어차피 터질 전쟁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914년 6월 28일 벌어진 사라예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초강경모드로 나설 것이라는 것이 국제외교가의 공통된 관측이었다. 그러나 정작 오스트리아 제국은 對세르비아 최후통첩에 1달 가까운 시간을 소모한다. 우선적으로 동맹국 독일의 절대적인 지지가 필요했으며, 두 번째로는 세르비아의 후견국인 러시아와 그 동맹국 프랑스의 태도를 주목해야 했다.

독일의 절대적 지지는 의외로 쉽게 떨어졌다. 빌헬름 2세는 영국과 프랑스가 발칸 문제에 개입하지는 않을 것이며, 러시아도 최종적으로는 위기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라는 조언을 받고 전면적인 오스트리아 지원을 약속하고 3주 일정으로 뱃놀이하러 갔다. 다만 독일의 지지에는 조건이 하나 있었는데 강경책을 쓰건 유화책을 쓰건 오스트리아가 확고한 결심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태의 직접 당사자는 오스트리아였으니 이 요구는 당연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는 여러 가지 내부 문제로 인해 사라예보 사건 발발 후 10여일이 지난 7월 7일에야 제국 내각이 소집되었고, 여기서 각료들의 출신별로 다른 정치적 입장 때문에 조율에 또 10여 일을 보내 7월 19일에야 통첩문이 완성되었으며 실제로 세르비아 및 유럽 열강에 이 통첩이 통보된 것은 7월 23일이었다. 통첩문이 완성되고도 오스트리아가 통첩 발송을 지연시킨 건, 그 시점에 프랑스 대통령-외무장관이 러시아를 방문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러시아 영토에 있는 도중에 통첩을 발송한다면 러시아-프랑스 간의 공동대응이 논의될 시간과 여지를 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렇게 세르비아에 전달된 최후통첩은 세르비아의 주권을 침해하는 수많은 조항이 담겨진 내용이었다. 반(反)오스트리아 교육의 금지, 사라예보 사건에 연루된 세르비아 관리들의 체포 및 심문, 오스트리아 관리가 직접 세르비아 영토에 들어가 수사에 참여할 것 등이 그것이었다. 오스트리아는 48시간 내에 통첩에 대한 답문을 요구했다. 이는 사실 오스트리아의 계략도 있었는데 오스트리아는 당시 세르비아 정부 수반들과 세르비아 주재 외교관들의 행적을 감시하고 있었고 세르비아 정부가 대답하기 어렵고 다른 나라와 외교적 협의가 어려운 타이밍에 최후통첩을 들이밀어 세르비아가 제대로 된 대처를 못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그리고 이 최후통첩이 세르비아에 도착했을 때 세르비아 수상은 지방 여행 중이어서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그나마 수도 복귀가 늦어 이미 최후통첩 48시간 중 24시간을 날려먹었다. 거기다 외교적 조언 역할을 해줄 강대국 외교관들도 우연의 일치로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러시아 공사는 사망, 프랑스 공사는 병환으로 각각 공석 중이었으며 후임자가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영국 공사는 자리는 지키고 있었지만 역시 병환.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다.

이 때문에 유럽 열강의 권고는 상당히 늦게 세르비아에 전달되었는데, 영국과 프랑스는 한결같이 님이 잘못했네여. 걍 수용하고 살려달라 하셈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비관론이 지배적이던 세르비아 내각은 이와 같은 권고를 받아들여 오스트리아의 통첩을 전면적으로 수용하려 했다.

그런데 통첩시한을 몇시간 남기고, 러시아 주재 세르비아 공사로부터 러시아가 우릴 지원한다!는 희소식과 함께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실질적인 낭보가 베오그라드에 도착했다. 사실 오스트리아가 조금만 더 빨리 행동했어도 러시아가 이런 신속한 결단을 내리긴 어려웠겠지만, 최종적으로는 사라예보 사건 이후 약 1달여를 허비하는 동안 니콜라이 2세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궁중관료들은 설마 독일이 개입하겠어? 이참에 오스트리아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는 식으로 결심을 굳혀버린 상태였다. 이에 세르비아 내각은 일제히 궐기하여 대 오스트리아 강경론으로 전환했으나, 러시아가 지원한들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라는 제국을 상대로 딱히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최후통첩 중 오스트리아 관리의 자국 영토 진입을 거부하고 나머지를 수용하기로 하는 결정을 내리고 이를 오스트리아에 통보했다.

하지만 백지수표를 내준 독일을(이것은 독일이 1차 세계대전을 피할 수 없는 원인이 되었다.) 등에 업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의 제안을 무시하고 세르비아의 외교공문 접수를 거부하는 동시에 국교를 단절했다.[25] 7월 28일에는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한다. 그러자 러시아는 세르비아의 독립을 보호할 것을 선언하고 7월 31일 총동원령을 내렸다.

러시아는 애초 부분 동원령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다. 특히 총동원령을 내리면 독일을 자극할 것이 명백하다는 것은 러시아 역시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군 수뇌부들은 “부분 동원령 내리면 오스트리아 놈들은 총동원령 내릴 텐데 그러면 빠르게 군사적인 대응을 할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제 오스트리아는 러시아가 참전할 경우 세르비아 전선과 러시아 전선을 동시에 유지해야 하므로 병력면에서 열세에 놓일 수밖에 없었으니 러시아가 부분 동원령을 내리더라도 오스트리아로서는 총동원령 수준으로 대응해야 했던 게 사실이었다.

거기다 이 시기에는 산업의 발전과 철도의 등장으로 총력전이 가능해지면서 전쟁은 더 빠른 시간에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해야 하는 달리기 경쟁으로 바뀌어갔고 적들이 유리한 곳을 차지하기 전에 먼저 가야 한다는 생각이 당시 유럽의 군 수뇌부 모두를 지배했다. 결국 차르인 니콜라이 2세는 참모들의 설득을 받아들이고 총동원령을 내렸다.

러시아의 총동원령에 위협을 느낀 독일 제국은 뱃놀이 갔던 카이저가 허겁지겁 베를린으로 돌아오고 수많은 격론 끝에 강경파의 주장대로 이런 때를 대비해서 만들어두었던 슐리펜 계획을 발동시키고 8월 1일 총동원령이 내려진다. 독일이 이렇게 강경하게 나올 수 있었던 건, 주 러시아 공사 및 독일 본국의 외무 관료들이 너네 1904년 못 봤음?? 러시아는 전쟁 좀만 하면 혁명나서 망함여. 그래서 함부로 전쟁 못하고 설사 하더라도 혁명 때문에 GG칠거임이라고 호언장담을 했고 이를 빌헬름 2세 및 독일 수뇌부가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한편, 빌헬름 2세는 양면전쟁의 위험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기에 승리가 불확실한 슐리펜 계획 대신 영국이 보증하는 프랑스의 중립 약속을 받아낼 수 있는 쪽을 선택하여[27], 몰트케에게 “당장 서부로 가는 병력 다 동부로 돌려야한다. 그러면 우리는 러시아만 이기면 승리한다” 라고 의기양양하게 외쳤으나 몰트케는 폐하, 지금 병력동원 다 시작되고 철도 움직이는 중인데 여기서 병력 이동을 취소하고 동부로 옮기면 혼란에 빠져 재배치되다 자멸할 것입니다라면서 맞섰다. 빌헬름 2세는 그에게 니 삼촌[28]은 가능하다고 하지 않았는가라고 비난하기까지 했으나, 결국 대 프랑스 개전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독일은 8월 1일에는 러시아에, 8월 3일에는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했다. 이에 8월 4일에는 프랑스가 의회 만장일치로 독일과의 전쟁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독일군은 슐리펜 계획대로 벨기에를 침략하는데 사실 벨기에 침공 직전에도 빌헬름 2세는 다시 한 번 몰트케에게 벨기에 공격하면 영국이 참전한다. 벨기에를 피해서 공격하라라고 명령했으나 몰트케는 안됩니다. 병력집결부터 기동, 전투까지 이미 계획이 짜여 있어서 벨기에가 넘어가지 않는다면 계획이 다 무너집니다라며 펄쩍 뛰어서 어쩔 수 없이 벨기에를 지나가게 된다.

당시, 영국은 느닷없는 발칸의 분쟁이 전 유럽을 휩쓰는 대규모의 전쟁으로 커지려고 하자 기가 질려서 직접적 참전을 꺼리는 중이었으나[30] 영국이 보증한 국제적인 벨기에 중립이 슐리펜 계획에 의한 독일의 침략으로 무시되면서 참전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 결국 독일에 맞서 참전하게 된다.

또한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는 아닐 것 같던 일본도 칭다오 무너트린 거만 빼면 별로 싸운 건 없지만 영일동맹에 근거해서 8월 28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했다.

이로서 당시 주요 열강국가 중 동떨어진 아메리카 대륙에서 혼자 놀고 있는 미국과, 중립을 선언해버린 이탈리아, 그리고 열강은 열강이지만 내부적인 문제가 많아서 참전은 무리라고 평가되던 오스만 제국을 제외하고 모조리 대전에 참가하게 된다. 그러고 이 세 나라도 결국 시간 차이를 두고 모두 참전하게 된다. 참고로 오스만 제국의 경우 영국의 병크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사실, 인척관계로 얽혀있던 각 참전국의 군주들은 내심 전쟁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높은 수준으로 산업화된 국가들은 이미 군주들이 일일이 통제하기는 어려운 수준으로 복잡해졌으며, 민족주의의 열풍은 군주들이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해 있었다. 이미 군주들은 자신이 다스리는 국가를 제대로 제어할 수 없었고, 오히려 군주들의 어설픈 조치 때문에 내부에서의 모순과 문제점은 더욱 커졌다.

4.1. 자원병 열풍

1차 세계 대전의 특이한 점 중 하나는 역사상 손꼽힐 정도로 크고 끔찍한 전쟁에 자원해서 입대하는 젊은이들이 넘쳤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20세기 초는 유럽에서 애국심과 민족주의 열풍이 강하게 불던 시기로, 전쟁에 참여하는 병사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전쟁터에 나아갔다. 또한 보불전쟁에서 징집된 병력을 철도로 얼마나 빨리 집결시키는지가 승리의 큰 요소가 됨이 증명되었었기 때문에 국가적으로도 모병과 애국심 고취에도 많은 힘을 쏟았다. 신문에서는 청년들에게 입대할 것을 권했고 “Your country needs you”, “I want you” 등 유명한 문구의 모병 포스터들이 거리에 붙여졌다. 물론 전쟁에 대해서 비판적이며 두려워하는 사람도 많았다.[31] 하지만 전쟁을 피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겁쟁이, 매국노 등으로 몰리기 일쑤였고 심지어 프랑스의 장 조레스처럼 살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주변 또래들은 자원해서 군대로 입대하는데 건강한 청년이 입대하지 않고 마을에 남아있기란 쉽지 않았다.

전쟁 그 자체에 대한 지나친 낙관도 있었다. 당시의 유럽인들은 보불전쟁 이후 40년 동안이나 이어진 벨 에포크 시대의 평화 때문에 전쟁에 대해 다소 낭만적인 생각과 동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100여년 간 전 유럽을 아우르는 대규모의 전면전도 없었고, 전쟁을 치르더라도 대부분 단기간 내에 좀 치고받고 끝나는 수준이었다.[32] 사실상 오랫동안 유럽 본토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던 탓에 유럽인들에게 전쟁이란 기껏해야 머나먼 식민지에서 낙후된 토착민들을 우월한 과학 무기로 학살하는 경험에 지나지 않았다.[33] 자신의 국가가 타 국가를 손쉽게 혼내줄 생각에 흥분한 사람은 많았지만 급속도로 발달하던 기계화된 무기들이 자신들을 향해 대량으로 사용되면 얼마나 공포스러운 일이 발생할 지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1910년대 초에 벌어진 몇 차례의 형식적인 국가들 간의 대치는 착각을 더욱 부추겼다. 독일과 프랑스가 식민지 대결을 하면서 이런 일이 자주 벌어졌는데, 그러다 보니 많은 청년들은 “전쟁.. 그까이거 뭐 그냥.. 대충 이번에도 적당히 대치만 하다가 끝나겠지?”라는 기대를 품기도 했다.

결국 전쟁 발발 초기에 영국, 프랑스, 독일의 모병소에 국가에 대한 거룩한 의무를 수행하며 영웅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흥분한 지원병 청년들이 미어터졌다. 하지만 이 전쟁이 얼마나 참혹할지, 오래 갈지 제대로 예상한 사람은 드물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전쟁이 길어야 3개월 정도 가고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에 차 있었다.

물론, 그들 중에서 일부는 진짜로 전쟁영웅이 되어 돌아왔다. 그러나 지옥보다도 끔찍하고 참혹한 환경을 버텨낸 뒤에야 살아돌아올 수 있었다.[34]

5. 전쟁의 전개

전쟁의 경과를 서술하되 대부분의 전투에 전용 항목이 있는 만큼 요약해서 서술해주시오.

5.1. 전쟁의 시작

1914년 7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 선전포고함에 따라 제 1차 세계 대전이 열리게 된다. 그 뒤 세르비아의 보호를 이유로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선포했고, 독일은 러시아에게 총동원령을 취소해 달라고 요청하고 무시되자 다음날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최초로 주변국을 침공한 것은 독일이었다. 독일은 서쪽의 프랑스를 최대한 빨리 굴복시켜 동쪽의 러시아 제국 방면으로 집중해 전쟁을 수행한다는 내용의 슐리펜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신속하게 움직였고, 1914년에 8월에 서쪽으로 진군을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8월 2일에 룩셈부르크를 점령하고, 3일에 프랑스에 대해 선전포고한 뒤 중립국 벨기에가 독일군의 통과를 거부하자 4일부터 침공해 점령한다.[35] 영국은 중립을 표방했었으나 영국이 독립을 인정했던 벨기에의 중립이 무시당한 것을 이유로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 한 뒤 프랑스로 지상병력을 투입하기 시작하였으며 발칸 반도의 국가 등도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선전포고를 교환한다. 8월 7일부터는 독일군이 프랑스 영토 안에서 국경 전투를 열어 승리해 파리 50여km 앞까지 진격할 정도로 선전한다. 한편 러시아가 급하게 8월 중순부터 독일을 공격했지만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반격당해 큰 피해를 입고 동부전선 우위를 내줬으며 오스트리아군도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전과를 올린다. 하지만 9월의 마른 전투에서는 독일군이 프랑스+영국 연합군에게 저지당하며 진격의 힘을 잃고 주저앉게 된다. 결국 독일은 계획대로 프랑스를 조기에 굴복시키는 것에 실패하게 되었고 우려했던 대로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양면에서 싸워야 하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아프리카나 아시아 등지에서도 유럽의 식민지였던 지역을 중심으로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으며, 특히 독일과 영국 식민지에서는 종전까지 현지 병력들의 전투가 계속 일어났다. 8월 말에 일본 제국도 영국과 함께 독일령이었던 칭다오를 침공해 점령했다. 태평양 지역에 있던 독일 함대는 본국으로 귀환을 시도했지만 영국 함대의 습격을 받다가 포클랜드 해전에서 괴멸되었다.

5.2. 참호전의 수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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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진격할 수 없게 된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프랑스 방면의 점령지역 유지와 방어를 위해, 연합군도 독일의 진공을 저지하러 서로 참호를 파기 시작한다. 그리고 상대편 참호의 측면으로 계속해서 기동을 되풀이한 결과 끝내 참호선이 북해에서 스위스 국경까지 늘어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다. 제 1차 세계 대전의 가장 끔찍한 이미지로 남아있는 참호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어느 나라에도 참호전이란 교리가 없었으며 의도된 전쟁 양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관총, 야포, 철조망 등 방어에 유리한 무기는 발달했으나 참호 돌파를 위한 효과적인 무기가 없었기에 양측은 효과적인 전진을 하지 못하고 인명피해만 늘어가는 소모전을 치루며 대치하게 된다. 대전기간 그 어느 쪽도 참호전 양상을 타개하는 데는 실패했다.
다만 서부전선을 제외한 동부전선이나 발칸, 캅카스, 중동 전선에서는 참호전이라고 부를 만한 상황 자체가 없었다. 이쪽에서는 철도와 기병을 동원해 대규모 기동전을 펼치고 있었다.[37]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의 양상이 판이하게 달라진 이유는 병력밀도가 차이나는 것이 컸다.

오스만 제국은 이 시점까지 눈치만 보고 있었다.[39] 그러나 1914년 7월에 영국에서 만들어지던 오스만 전함 두 척을 동맹국 병기라는 이유로 영국이 부당하게 압류하자[40] 오스만의 영국에 대한 여론이 나빠졌으며 8월에 독일은 오스만에게 비밀리에 동맹을 추진하고 전함 두척을 양도하고 군사적으로 지원해줘 환심을 산다. 그리고 오스만 해군 소속이 되었음에도 독일해군이 지휘하던 이 두 전함은 10월 말에 러시아의 세바스토폴 항구를 기습공격해버렸고 러시아는 11월에 오스만 제국에게 선전포고하여 캅카스 방면을 공격하기 시작해 오스만도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영국과 프랑스는 곧 중동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하고 영국령 인도군도 자치권을 강화시켜준다는 영국의 꼬임에 넘어가 영국군에 가세한다.

1914년 12월, 대부분의 군인들이 집에서 보내리라 생각했던 크리스마스가 다가 오자 서부전선에서 대치하던 연합군과 독일군은 암묵적으로 휴전한채 각자의 참호에서 조촐한 축하행사를 가졌으며 기적적으로 서로 총을 거두고 적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이 해가 가자 다시는 이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5.3. 정체되는 전쟁 상황

1915년 1월에 오스만 제국과 독일은 영국과 영국령 인도의 연결을 끊어버리기 위해 수에즈 운하를 공격하였으나 점령에 실패한다.

2월부터 독일은 영국의 해상봉쇄를 뚫고자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실행해 연합국의 상선 등을 무차별적으로 격침시킨다. 하지만 5월에 영국의 여객선 루시타니아 호가 격침되며 미국인 100여명이 죽자 미국의 참전여론이 거세졌고 이를 두려워하던 독일은 미국에 사과하고 작전을 중단한다.

영국은 꽉 막힌 서부전선의 교착을 풀어줄 돌파구를 찾을 겸, 독일에 고전하면서 오스만까지 상대하던 러시아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프랑스와 연합한 함대를 보내 2월에 오스만 제국의 영토인 다르다넬스 해협을 돌파하려고 했으나[42] 거센 저항 때문에 실패했고 4월부터 다시 지상군을 동원한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실행했지만 결과적으로 최악의 상륙작전이란 결과를 본 채 이듬해 1월에 물러날 수 밖에 없게된다. 이 일은 윈스턴 처칠의 가장 큰 흑역사가 되었다.

한편 4월의 연합국의 공세를 조용하게 지켜보던 이탈리아 왕국은 결국 삼국 동맹을 공식적으로 배신하여 연합국에 가담한 뒤 바로 5월에 전 동맹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를 한다.[43]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지대를 공격하자 오스트리아는 고전하게 된다.

동부전선에서는 8월에 독일군이 러시아 제국령 폴란드의 중심 도시인 바르샤바를 점령할 정도로 독일이 우위를 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독일이 러시아 제국의 수도 모스크바로 진격하기에는 여전히 러시아의 병력은 많았으며, 거리도 너무 멀었고 애초에 동부는 독일의 양면 전쟁에서 우선 순위가 아니었다.

10월에는 불가리아 왕국이 동맹국으로 참전하여 오스트리아가 고전하던 세르비아 방면의 전투는 물론 발칸 반도 지역의 정세가 동맹국에게 유리하게 넘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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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권에서 일명 Going over the top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진. 참호에서 올라와 기관총탄과 포탄이 난무하는 무인지대로 돌진을 시작하려는 영국군을 찍은 사진으로, 솜 전투의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일 것이다.

1916년이 되자 서부전선의 전투는 격화되지만 상황은 점점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특히 베르됭 전투와 솜 전투에서만 200만명이 살상되는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했지만 전황은 크게 변한게 없었다. 다만 베르됭 전투 이후 독일은 전력이 약해져 서부전전에서 방어 입장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독일 해군은 5월에 영국의 해상봉쇄를 뚫기 위해 영국 해군과 유틀란트 해전을 벌여 상대적으로 유리한 전과를 올렸지만 애초에 체급이 다른 해군이었고 봉쇄는 그대로였다. 이후 독일은 드레드노트 함대전을 포기하고 잠수함만 바라보게 된다.

오스트리아는 2월에서야 세르비아 왕국을 힘겹게 점령했다. 게다가 6월에는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와 독일 동맹군을 상대로 브루실로프 공세를 펼쳐 오스트리아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약체라는 것을 명확히 드러냈다. 하지만 러시아 역시 여전히 엄청난 병력을 동원하고 있었지만 독일군에 비해 전력이 열세였으며 피해는 꾸준히 누적되고 있어 1916년 말까지 500만의 병사가 사상당했고 경제적으로 피폐해져 국내의 불만은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경우에도 중동의 아랍 부족들이 오스만으로부터 독립을 원하고 있었던 것을 영국이 지원하여 6월에 아랍 반란을 일으켜 오스만 제국은 이 지역에서 수세에 몰린다.

전쟁기간 동안 서부전선의 참호전을 타개하기 위해 숱한 신병기와 전술이 개발되었다. 현재까지 사용되는 거의 모든 보병전술의 기초가 이 시기에 확립되었다. 전쟁이 시작되던 1914년에는 어느 국가의 병사도 철모를 쓰지 않았으나 점차 너나할 것 없이 채택하기 시작한다.[46] 독일은 1915년 4월부터 시작된 2차 이프르 전투에서 살상용 독가스를 사용해 효과를 봤고,[47] 6월에 화염방사기를 첫 배치했다. 영국은 전차를 발명해 마크 1이 솜전투가 펼쳐지던 1916년 9월에 실전 투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병기들로도 참호전의 양상을 궁극적으로 타개하지는 못했다. 독가스는 사용조건에 제한이 있는데다 화학전 방호장비가 보급되면서 효력이 감소했고, 전차는 가장 획기적인 발명이었으나 초기 전차는 성능이 부족한데다 전차 운용에 대한 노하우가 없어서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는 바람에 참호전을 궁극적으로 타개하는 데는 실패했다. 실제로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의 전차는 거의 움직이는 엄폐물 정도였다. 전쟁 말기인 1918년에는 MP18 등의 기관단총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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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기의 군사적 활용의 발전도 두드러진다. 전쟁 초에는 단순히 정찰, 그리고 상대 국민에 대한 테러 목적으로 미미한 폭격이 있었으며, 비행선을 이용한 폭격이 시도되기도 하지만, 공냉식 기관총과 동조식 발사장치의 개발로 1-2정의 기관총을 가진 빠르고 민첩한 전투기가 상대의 기구, 비행선, 정찰기를 격추시켜 나갔으며, 이에 따라 폭격용 비행선은 빠르게 사라지고 보다 빠르고 크기대비 폭장효율이 좋은 대형 폭격기가 등장하여 상대국의 도시를 노리게 된다. 이에 따라 자국 방공망 구축보다 효율적인 항공기 운용을 위해 1918년부터 영국 공군이 세계최초로 결성되었으며, 다른 참전국들도 따라간다. 대전 말 전략폭격의 이론이 영국의 트렌차트, 미국의 미첼, 이탈리아의 두헤에 의해 서서히 탄생하기 시작한다.

5.4. 미국의 선전포고와 러시아 혁명

독일은 2월부터 다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재개한다. 결국 이 것과 독일의 테러들[48], 치머만 전보 사건 등을 견디다 못한 미국은 4월에 독일 등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고, 동맹국은 시한부 인생이 되었다. 하지만 급하게 징집한 병사들의 훈련 등을 이유로 미국은 전쟁 참여에 조심스러웠고, 6월부터 프랑스에 훈련이 끝난 소규모의 미군 부대가 도착하기 시작했지만 1918년 5월까지도 큰 교전을 하지 않았다.

1917년에 들어서 러시아 2월 혁명이 터져 니콜라이 2세가 폐위되고 러시아의 체제가 전복된다. 하지만 새 정부는 여전히 독일과의 전쟁을 수행하려 하였으며, 내부적 불만 요소는 그대로였기에 사회에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감돈다.

1917년 3월에 영국군은 오스만 제국의 도시였던 바그다드를 점령하였고, 곧 메소포타미아의 대부분을 손에 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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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4월에 독일은 혼란한 러시아로 망명중이던 레닌을 기차에 태워 귀국시켰다. 레닌의 혁명이 성공하면 독일과의 전쟁을 그만둘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이렇게 러시아의 내부 상황이 혼란으로 치닫자 프랑스와 영국은 초조해졌고, 서부전선에서 4월부터 연이은 연합군의 대공세가 펼쳐지며 7월의 치열한 파스샹달 전투까지 펼쳐졌지만 대량의 인명이 소모된 것에 비하면 작은 승리였으며, 전략적으로 변화를 가져오진 못했다.

한편 이탈리아 왕국과의 연이은 전투에서 압박을 느끼던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 전선에만 집중하려고 동부전선에서 발을 뺀다. 이후로 사실상 동부전선은 독일 혼자 담당하며 이탈리아 방면의 전선마저도 독일이 지원해주는 눈물겨운 상황이 펼쳐진다. 그러나 10월에 펼쳐진 카포레토 전투에서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함께 이탈리아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으며 이 전투로 이탈리아가 주춤하며 방어로 돌아서자 독일은 마무리하고 서부전선으로 집중한다. 하지만 1918년에 들어 오스트리아는 단독으로 공세를 펴다 이탈리아에게 수십만의 사상자를 연달아 내버린다.

1917년 10월 혁명의 여파로 러시아 체제가 전복되고, 11월에 레닌은 자신을 지원했던 독일과의 전쟁을 멈춘다. 독일은 서부전선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프랑스나 영국은 큰 위기감을 느꼈지만 사실 독일 역시 이미 인적 경제적 손실이 누적되어 국가적으로 피폐해져 있었다. 러시아에도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고, 적백내전이 시작된다.

1918년 1월에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평화 14개조를 발표,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웠고 이는 핍박받는 민족과 국가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나[50]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에게는 종전 후 분열을 가져오는 치명타가 된다.

5.5. 동맹국의 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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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3월, 독일의 경제는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고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기 전에 상황을 반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쥐어짜 서부전선에서 루덴도르프 공세를 펼쳤으나 심각한 피해를 입고 얼마 못 가 주저앉게 된다. 이 공세에서결국 미군도 본격적으로 전투에 참여하여 5월에는 미국이 독일을 상대로 한 첫 승리를 거둔다.

결국 1918년 8월부터 미군은 하루에 만 명씩 프랑스로 들어오게 되고, 90만명의 미군을 포함한 연합군은 바로 독일을 상대로 백일 전투를 펼쳐 전례없던 속도로 전선을 밀어내며 서부전선에서의 독일군 주요 방어선인 힌덴부르크 선을 붕괴시킨다.

결국 희망이 사라진 동맹국들은 내부적으로 패배에 대해 거론하기 시작한다. 9월에는 불가리아가 연합국과 휴전했으며 10월에는 오스만 제국이, 11월에는 혁명이 일어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연합국에 항복하였고 독일도 킬 군항의 반란을 시작으로 반정부운동이 다발적으로 일어난 11월 혁명으로 정부가 무너져 같은 달에 연합국에 항복하였다.[51]

항복 직전의 독일은 전선의 병사들도 굶주림에 못 이겨 연합군 참호를 습격해 음식을 약탈해 오고, 후방의 민간인들은 1주일에 감자 한번 구경할 정도로 굶주리고 있다가 마침내 전선과 후방에서 균열이 벌어지고 있었다.[52] 물론 연합국의 상태도 막장이었지만 싱싱한 미국 병력이 쏟아져 들어오는 상태라 독일은 항복하는 길 밖에 없었다.

다만 독일은 항복하는 순간에도 프랑스 영토 안에서 서부전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국 영토에 적군을 한 발짝도 들이지 않은 상태에서 맞은 패전은 많은 독일 국민들에게 분노와 의심을 안겼으며 일명 내부로부터의 중상이라는 도시전설이 폭넓게 퍼지게 된다. 이것이 후일 히틀러와 파시즘이 일어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6. 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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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 이전과 이후의 지도 변화 (붉은색 국경선이 이후)

1919년 6월에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반영한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고, 생제르맹 조약, 트리아농 조약, 세브르 조약, 뇌이 조약이 체결되어 패전국들은 많은 영토가 민족별 국가로 나눠저 독립해버렸다. 패전국인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연합국과 신생 독립국에 일부 영토를 할양하고 가지고 있던 식민지도 토해내야 했다. 독일 황실과 오스트리아 황실도 무너젔고 오스만 제국도 사실상 멸망했다. 러시아 제국도 혁명으로 붕괴했고 발트3국이나 핀란드, 폴란드의 독립도 이루어젔다. 승전국인 프랑스,영국은 식민지를 가지거나 영토를 일부 할양 받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얻게 되었다.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로부터 약간의 영토를 할양 받고 지중해랑 터키쪽에 세력을 폈으나 애당초 의도했던 트리에스트, 이스티리아, 달마티아(미수복 이탈리아) 등은 얻질 못하는 등 생각외로 많은 이득을 얻지 못해 이에 불만을 품은 국민이 파시즘을 지지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에서 빼앗은 땅을 합쳐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건국하였다. 일본은 1차 대전으로 경제호황 및 독일의 아시아, 오세아니아 식민지랑 중국의 이권들을 조금 획득하였지만 역시 대공황으로 불황을 겪자 군국주의가 대두하였다.

우드로 윌슨은 ‘평화 원칙’을 내세우며 베르사유 조약 1조에 국제연맹의 창설에 관한 조항을 넣었으며 1920년 1월에 첫 국제연맹 회의가 런던에서 개최되었고, 이것이 제 1차 세계 대전의 공식적 종결이 되었다.

6.1. 이후의 영향

제1차 세계대전의 가공할 피해는 대전 직후 대부분의 국가에서 염전사상을 확대시켰다. 전쟁에 대한 가공할 공포는 열강들에게 더 이상의 1차 대전과 같은 재앙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품게 만들었다. 이 염전 풍조는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영-불의 독일에 대한 소극적, 유화적 외교시책의 원인이 되었다.[53] 당대의 이러한 염전 풍조 확산은 그 시대의 사람들로 하여금 제1차 세계 대전이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었다는 평가를 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은 더욱 거대한 전쟁의 전초전이 되고 말았다. 페르디낭 포슈 원수는 베르사유 조약에 사인하면서 이 조약은 기껏해야 20년 휴전 협정에 불과하다고 평가했고 20년 뒤 1939년, 제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다.

군사학적으로는 승자와 패자에게 완전히 다른 영향을 미쳐 2차 대전 초기 전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승자인 영국과 프랑스는 1차 세계 대전의 전훈을 압도적인 화력과 방어자의 우세로 결론짓고 방어 위주의 군사사상을 도입, 마지노 선 건설 등의 뻘짓을 벌이지만, 독일은 그 우세를 극복하기 위한 기동전 연구에 힘을 써 결국 1940년, 20년 전에는 4년 동안 점령하지 못했던 프랑스를 단 6주 만에 점령하는 쾌거를 달성한다.

또한 제정 러시아와 독일은 정부가 무너져 각각 소련과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다시 탄생하였고, 독일은 단치히와 주변지역을 폴란드에게 넘겨준다. “폴란드 회랑”으로 불리우는 이 지역은 내륙국 폴란드에게 해상로를 열어주었지만 훗날 독일의 나치는 이를 빌미로 폴란드와 전쟁을 일으킨다.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오스만 제국은 해체되어 그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게 된다.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약간의 영토를 받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이탈리아의 범위에 속하는 영역을 다 받진 못했으며, 이에 대한 불만은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들이 잘 이용해먹는다.

영국과 프랑스는 승전국이었음에도 전쟁 이후 식민지와의 연결이 끊어지고 경제적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어 제국 해체의 발단이 된다. 특히 프랑스는 인구 측면에서 국가발전의 근간이 되는 성인청년 인구들의 1/3(부상자 포함)을 잃어버렸기때문에 전쟁 후유증은 심대했다.[54] 근대 이전까지 프랑스의 인구는 영국과 독일을 압도했지만 19세기 무렵에 독일에게 크게 추월당했고, 이런 상황에서 두 번의 세계대전 동안 인구 증가가 정체되면서 영국에게도 뒤쳐진다.[55] 1990년대까지는 영국보다 적은 인구를 유지했으며 이는 프랑스가 과거의 독보적인 위치를 다시 찾지 못하게 된 한 원인이었다.

유일하게 일본만은 피해를 입지 않은 채 태평양(남양군도라고 불렸던 미크로네시아 연방 일대)과 중국에 식민지를 획득하였다.

이 전쟁은 이전 전쟁과는 달리 전쟁으로 인한 인적 자원의 손실을 국가들이 감당하기 힘든 경우였다. 무기체계의 발달, 특히 참호전 양상으로 흘러간 전쟁 양상과 더불어 새롭게 개발된 야포와 기관총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높은 속도로 병력이 소모되게 하였으며,[57] 이에 반해 나이 많은 고령의 지휘관들의 생각은 나폴레옹 전쟁 시대의 교리에 머물러 있었다. 이전의 경우 비교적 엉성한 화망과 포를 뚫고 닥치고 기병 or 보병이 진격해서 적군을 유린하면 되는 반면, 1차 대전 초기 전선에서는 기관총에 병력을 돌진시켜야 하는 상황임에도 양군의 지휘관들은 돌격하여 상대의 방어를 분쇄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이같은 무모한 돌격명령은 지휘관들의 ‘공격낭만주의’와 더불어 공격하여 적의 진영을 탈취하고 적병을 사살하는 것을 명예로운 일이자 커다란 전공으로 여기고, 방어선을 굳게 하여 나오지 않는 것은 불명예스러우며, 계집애같은 행위로 여기던 경향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일본 군대에서 이 공격만능주의적 사고방식을 여전히 유지하는 이들이 있었다. 오히려 청일전쟁, 러일전쟁 때나 1차 대전 당시 칭다오 전투에서 일본군의 전투 교리는 공격만능사상식 돌격이 아니었으며 포격이 주축이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정신력만 강조하는 교리가 일본군을 지배하게 되는 것은 1920년대를 넘어서인데 이러한 교리가 성립되는 데는 러일전쟁 당시 독일식 화력전에 입각한 포격이 당시의 기술 부족에 의해 영 시원치 않았던 경험과 1차 세계대전의 탄넨베르크 전투와 총력전 양상이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일본의 산업능력으로는 1일당 수십만발을 쏟아붓는 서구 선진국의 “사치스러운” 전투를 따라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선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식의 전투를 지향해야 한다”라는 무대포스러운 결론으로 이른 것이다.

초기 전선이 고착된 이후에 무모한 돌격은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거 말고는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는 게 더 큰 문제. 최근에는 1차 세계 대전 당시 지휘관들의 무능력에 대해선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보고 있다. 지휘관들이 전선이 아닌 후방의 성에서 체류하면서 작전 지시를 했던 것도 전선의 크기나 결정해야 할 사항 등을 고려할 때 몸을 사렸다기보다는 불가피한 지휘 방식이었다는 것이며 이는 현대전에서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전선 시찰 과정 등에서 일어난 고위급 지휘관들의 사상률 역시 상당해서 몸을 사렸다는 주장 역시 부정확하다고 한다. 1914년 전쟁 초기를 지나서 참호선이 구축되고 전선이 고착될 때까지만 해도 보불전쟁의 전훈으로 구축된 보병 기반의 기동전 교리가 대부분이었지만 전황이 참호전으로 고착되면서 자연스럽게 기존의 교리로는 전투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으며 포격을 비롯해서 적의 진형을 보병의 돌격 이전에 무너뜨려야 된다는 점에는 의견이 일치하였다. 단지 참호와 철조망으로 구성된 적의 진지에 충분히 빠르고 효과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을 뿐.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포격이나 화학전, 공습, 전차의 개발 등 당시에 할수 있는 일은 다 해보았으며 그러한 시행착오의 결과 전쟁발발 당시인 1914년의 보병 기동전술과 전쟁후기의 1917, 1918년에 독일군이 보여준 후티어 전술이나 연합국이 보여준 제병합동전술의 수준은 천지차이였다.

문제는 이러한 학습이 무수한 병사들의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점과 향상된 전술이 효과를 보는 상황에서조차도 높은 손실률 자체는 해결되지 않았다는 한계는 있었다. 진격조차 못했던 무의미한 희생이 그나마 진격은 가능한 유의미한 희생으로 바뀐 정도. 무엇보다도 매끄러운 작전 연계를 위한 통신 기술, 특히 무선통신 기술이 여전히 초기 단계에 머물렀기 때문에 포격으로 적의 진형을 무너뜨리는 순간에 보병을 돌격시켜 적을 섬멸한다는 것은 책상 위에서나 가능한 것으로 실제로는 아군에게 포격을 하는 불상사에 대한 염려로 쌍방의 매끄러운 연계가 거의 부재했다. 존 키건은 자신의 저술에서 과학 기술이 인명을 살상하기에는 충분히 발전하였으나 인명의 손실을 최소한으로 막기에는 미흡하였다고 하였다. 즉, 세상을 밝게 해줄 것처럼 여겨졌던 과학 기술이 인간을 죽이는 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이었지만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 기관총이나 가스탄 같은 병기가 너무도 쉽게 인명을 살상하는 반면에 철도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계속된 징병을 통해 전선의 병력을 바로바로 보충하였기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죽어도 전선이 유지되었다. 결국 동부 전선이 어느정도 정리되고 독일이 서부 전선에 총력을 다 했을 때에도 발전된 전술에 힘입어 전선의 돌파는 가능했지만 그 돌파를 확대시킬 역량은 없었고, 이후 제병합동전술로 독일군을 밀어붙이는 연합국에 대항하여 더는 싸울 수 없을 만큼 자원이 소모된 이후에야 전쟁이 끝나게 된다.

이런 시체의 산을 손쉽게 쌓아올리는 지옥도 같은 전쟁 양상은 이전 과학기술이 평화로운 풍경 하에 발전하던 시절에 품었던 벨 에포크적인 과학과 이성으로 가득 찬 희망차고 밝은 미래상의 붕괴를 불러오고 그 과학이 미치광이 같은 전쟁 상황에 동조하고 도리어 더 악화시켰다는 점에서 과학에 대한 회의주의적 시각을 불러오게 되었다. 반면에 당시의 미흡한 군사 기술에 대한 연구는 어마어마하게 발전하였으며 이후 이어지는 2차 세계대전에서 일말의 희망마저 꺾이게 된다.

여기에 또다른 문명의 발달인 국가 관리 체계의 발달과 민족주의에 의거한 국가 총력전으로의 변화는 이전보다 효율적으로 대량의 인원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는 앞서의 요인 등으로 도리어 인적 손실을 극대화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특히 양심적이고 지성을 갖추었던 젊은 세대의 20~30대 엘리트들이 굉장히 큰 희생을 치렀다. 엘리트로써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교육을 철저하게 받았기에 능력여하를 불문하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앞장서서 전장에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다수가 살아 돌아오지 못했으며, 살아 돌아온 사람들도 상당수가 장애를 입거나 PTSD 상태가 되었다. 영국의 이튼 수상 같은 경우 이 시기 입은 부상으로 평생을 고통스러워했으며, 명문대인 영국 캠브리지나 옥스포드의 전사자 비율이 엄청나게 높았다고 한다. 당시 귀족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회계층의 참전자수 대비 전사자수 비율은 8:1이었는데 귀족층은 5:1이었다. 다섯명 중 한명은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대부분의 젊은 엘리트들이 초급장교로서 공격의 선두에 서야만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참고 대한민국으로 치자면 2~30대 남자 석사나 박사가 소위, 중위 계급장 달고 나라를 위해 군에 입대했다가 되도 않는 닥돌전략으로 1/3이, 철조망에 막히고, 기관총과 가스탄에 맞아 전사했고, 또 다른 1/3이 중추신경계 손상, 실명, 사지의 일부 절단 등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다고 생각해보자.

엄청난 소모전이 끼친 또 하나의 영향으로는 바로 진정한 귀족계층의 몰락. 당시 많은 귀족들이 하급 장교로 참전하였는데 위와 같은 끔찍한 소모전을 거치면서 전멸하는 바람에 귀족의 대가 끊어져버렸다. 소위 프랑스 혁명으로 구체제가 몰락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 이후도 구체제의 잔재가 꽤나 많이 남아 있었다. 허나 이 전쟁으로 인해서 정말 다 죽어버려서 비로소 진정한 구체제의 종말을 가져왔다. 당연히 과거 지배계층이 몰락하는 것으로 전통적인 제국 또한 종언을 맞이하게 되었다. 여기에 동반하여 민주주의 사회가 발아하게 되었다. 위의 계층이 전멸하는 것과 동시에 후방에서 갖은 군수물자 동원을 통해 대중들의 발언권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여성들이 참정권을 획득한 것이다.[58] 전쟁동안 여성들이 남성들을 대신해서 공장에서 일했는데 이것이 여성들의 사회적 발언권을 키운 것이다. 미국에서는 흑인들이 스스로의 권리와 힘에 대해서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 점 역시 대중들을 선동하는 형태인 파시즘의 탄생을 가져왔고, 이 파시즘 발흥의 맥락에서 나치즘이 등장했다. 그리고 이 나치즘은 다시 한번 극단적인 팽창주의를 지향하며 2차 세계 대전이라는 더 끔찍하고 더 참혹한 전쟁이 터지게된다.

이렇게 국민들을 총알받이로 희생시켰으니 국가에 반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공산주의 계열에서는 국가의 지배세력들이 자본주의의 논리로 움직이므로 국가를 전복하고 공산 국가를 만들고 모두가 평등한 사회로 살자고 주장했고, 자유주의자들은 국민의 더 많은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극이 있으면 또 다른 극이 있듯 이와는 반대로 국가에게 모든 권력을 실어주고 국민들을 국가가 시키는 대로 총 단결하고 자신의 국가와 민족만 잘 살자는 극단적인 전체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했고, 전쟁에서 지면 모든 걸 잃지만 이기면 모든 걸 보상받을 수 있으니 군대가 국정을 좌우하는 군국주의가 패전국은 물론이고 일부 승전국에서도 보여졌다. 20세기 사상의 대립과 충돌의 시작이다.

한편으로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들이 이 전쟁 이후 독립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종전 전에 국회에서 공표한 14개조 평화원칙 Fourteen Points에 민족자결주의가 포함되어 민족의 운명은 민족이 스스로 결정한다는 사상이 널리퍼지게되면서 대한민국을 포함한 식민지 내의 독립운동에 큰 불을 지폈다. 또한 소련의 레닌은 이 전쟁을 극단적 자본주의인 제국주의적 전쟁으로 규정하고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여러 나라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게 되는데 이런 공산권의 지지 또한 혁명에 불씨를 당기는데 일조하게 된다. 식민지를 전세계에 가지고 있던 제국주의 국가들도 제1차 세계 대전 후에는 해외 영토를 그나마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이마저도 유지시킬 힘이 남아 있지 않아 전부 독립시키게 된다.

일각에서는 이미 18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던 자유주의 무역에 기반한 100년의 세력균형 평화시대는 전쟁이 아니었어도 경제적인 이유로 종결될 기미를 보였으며, 1차 대전은 단지 그 부산물이었지 결코 원인이라고는 볼 수 없다는 시각도 있다. 칼 폴라니가 대표적.

한편으로는 세계 평화에 기여한 면도 있는데 히틀러를 비롯한 추축국 수뇌부들의 똘기로 시작된 제2차 세계 대전과 달리 제1차 세계 대전의 개전 과정은 당시 기준으로 수뇌부들이 이성적인(…) 판단을 한 결과 최악의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 때문에 국제정치학에서 매우 중요한 연구과제로 떠올랐고 그 성과로 인류는 과거에 비해 대규모 총력전을 회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특히 바바라 터크먼의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정을 연구한 저서인 “8월의 포성”은 케네디 대통령이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핵전쟁을 막고 인류를 구하는 결정을 내리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59]

인류의 역사가 2014년에 들어서면서 1차대전 개전 100주년을 맞았으며, 2018년에는 종전 100주년이 된다.

7. 기타

  • 당대의 역사상 최대의 전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명피해가 독보적이진 않다. 군인들이 수 없이 죽긴 했지만 이전에 벌어졌던 대규모 전쟁에 비해서는 기간이 짧았고 민간인의 피해도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 사상자로 본 전쟁의 순위. 반면 제2차 세계 대전은 발달한 무기나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 조직적인 학살 등으로 인해 훨씬 많은 인명피해를 내었다.
  • 2011년 현지 시각으로 5월 5일 제1차 세계대전 참전자 중 전투를 경험한 최후의 생존자였던 영국인 클로드 스탠리 슐스(14살 때 해군으로 참전)가 호주에서 사망하였다. 기사 친지들의 증언에 의하면 슐스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 모두 참전했기에 평생 동안 전쟁을 혐오했다고 한다. 전투를 경험하지 않은 최후의 생존자 플로렌스 베아트리스 그린(영국 공군 여성 항공대)도 2012년 2월 4일자로 사망했다. 하여 “누군가의 경험인 1차 세계대전”은 21세기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공식적으로 밝혀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최후의 사망자가 있다. 이름은 조지 로렌스 프라이스(George Lawrence Price)로 캐나다군 소속이었다. 그는 1918년 11월 11일 종전을 단 2분 남기고 독일군 저격수에게 총을 맞아 전사했다. 다만 이날 그 한 명만 죽은 것은 아니고 종전까지 양측 도합 11,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독일군이 예상보다 악착같이 저항했기 때문이다.
  • 프랑스와 영국은 미군에게 자신들의 지휘 아래 보충병력으로 사용하려고 했지만 미국이 거부했다. 하지만 당시 흑인으로만 이루어진 369 연대만은 프랑스에게 지휘권을 넘겨줬다. 이들은 프랑스 장비를 지급받기도 했으며 프랑스 16사단이나 161 사단에 배속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들은 열심히 싸웠으며 백명 단위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 등을 받았다.
  •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제 1차 세계 대전에는 유색인종도 수백만명이 참여했던 전쟁이다. 아프리카 전선에서도 20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참전했으며 독일과의 인구 차이[60]와 인적 피해로 고심하던 프랑스는 세네갈 등지에서 시민권과 훈장을 미끼로 아프리카인 자원병들을 모아 유럽의 서부전선에 참전시켜 수만명이 사망하였다. 프랑스는 이들을 거칠고 야만적인 총알받이 전사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에 위험한 임무에 우선 투입했고, 부대의 사망률이 프랑스 백인들보다 월등히 높아 항명이 일어나기도 했다. 한편 영국은 인도나 뉴질랜드 등에서 수십만에 달하는 병력을 모았었고, 이들은 영연방의 일원이란 자부심과 자치권, 돈 등 다양한 동기를 위해 참여했다. 그나마 이들의 사망률은 영국 백인들보단 절반 수준으로 낮았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프랑스처럼 인종차별적인 전투민족론에 따른 편지 검열이나 부실한 장비 지급 등의 문제가 존재했다. 중국에서도 수십만명의 노무자를 보내 전쟁터에서 노동력을 제공했다. <세계 대전: 제국의 잊혀진 병사들(The World’s War: Forgotten Soldiers of Empire)> 등의 다큐멘터리에서는 이러한 유색인종 병사들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참고로 독일은 백인이 아닌 인종을 전쟁에 투입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강해 적극적으로 식민지의 병사들을 유럽으로 데려오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군의 세네갈인 부대는 라인란트 등에 주둔했고, 여기서 태어난 혼혈들은 훗날 아돌프 히틀러나 오이겐 피셔같은 우생학을 신봉하는 나치에게는 아리아인의 피를 더럽힐려는 음모의 결과로 받아들여져 불임 수술 등을 당했다.
  • 이 시기에 국가들은 최신 무기뿐 아니라 구식 대포는 물론이고 군마, 군견, 전서구, 낙타 등 동원할 수 있는 건 다 동원해서 전쟁을 치렀다. 오죽하면 동물원의 코끼리를 징발해서 물자 수송에 쓸 정도였다. 그래서 1차 대전은 지금까지의 모든 전쟁 중에서 가장 많은 동물을 동원한 전쟁으로 기록을 세웠다.사진들
  • 독일군은 파리 대포(Paris-Geschütz)라는 이름의 초대형 대포들로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 영토 안에서 파리를 포격했다. 사거리 130km. 이때부터 제 2차 세계 대전에 등장한 구스타프 열차포의 싹수가 보였다.
  • 전쟁 초기 리에주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 독일군은 신무기인 크룹사의 420mm 곡사포를 동원했다. 이는 곧 빅 베르타(Big Bertha)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사람들은 종종 다른 독일군의 대형 포도 그냥 빅 베르타라고 불렀다.
  • 최고의 에이스 파일럿은 붉은 남작(Red Baron)이란 별명으로 유명한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Manfred von Richthofen)이다.
  • 독일의 화가 오토 딕스(Otto Dix)는 전쟁에 참여했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후에 강도높은 표현의 작품들을 제작했다. 반면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는 위장무늬를 그리다가 베르됭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오스트리아의 에곤 실레는 1년간 징집을 피해다녔음에도 운 좋게 프라하에서 복무할 수 있었지만 종전 직전 독감으로 사망. 영국의 에릭 케닝턴(Eric Kennington)은 의가사 제대를 하고도 재입대 하며 종군 화가로 일했다.
  •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은 평화주의자로서 활동한 혐의로 1916년 100파운드의 벌금형을 받고 강사직에서 쫓겨났으며, 1918년에는 미국의 참전에 대해 반대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6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한편 그의 제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탈장으로 면제를 받았으나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 때문에 오스트리아 군에 자원해서 입대했다. 게다가 거기서 더 나아가 최전선의 관측병으로 자원하는 등 만용에 가까운 행위를 하였으나 운 좋게 살아남았고,[61] 장교로까지 승급했으며 전쟁터에서 중요한 철학 논문인 <논리철학논고>까지 집필하는 업적을 이룬다. 그러나 러셀의 지인이었던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아들 에릭 화이트헤드는 전쟁에 자원해서 입대했다가 사망하였다.
  •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명성을 떨친 제 2차 세계 대전 때와 다르게 제 1차 세계 대전에선 실책을 연발로 했었다. 전쟁 전에 오스만이 영국과의 동맹을 제안했을 때 반대한 인물 중 한 명이었으며, 해군장관으로써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입안했지만 이 작전의 거대한 실패로 정치적 인생이 끝나 의전직에나 있다가 퇴임해 전방의 육군 중령이 되어 활로를 모색해야 했었다. 그나마 곧 군수장관으로 임명되어 당시 막 개발되던 탱크의 개발을 지지해주는 등의 공적으로 그나마 만회를 할 수 있었다. 반면 훗날 터키의 국부가 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갈리폴리에서 오스만의 대령으로 큰 전공을 세워 장군으로 승진되었으며 큰 명성을 얻고 대전 직후에 터키 독립전쟁에서 활약했다.
  • 해군 관련 사진들 이글루

8. 연표

1914년
날짜 사건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사라예보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암살
7월 5일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 독일-오스트리아 동맹에 의거해 개전시 오스트리아 지지 천명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7월 29일 러시아 제국, 보호국 세르비아를 위해 총동원령 발동
8월 1일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에 선전포고
8월 3일 독일 제국, 프랑스에 선전포고, 벨기에 침공. 슐리펜 계획 발동
8월 4일 독일 제국, 영국에 선전포고
8월 6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선전포고
8월 23일 독일군, 프랑스 침공 시작
8월 23일 일본, 영일동맹에 근거해 독일에 선전포고
8월 25일 일본,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
8월 26일 러시아군,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참패
9월 6일 마른 전투 개시
9월 14일 마른 전투의 실패로 독일군 총참모장 소 몰트케가 해임되고 에리히 폰 팔켄하인으로 교체.
10월 18일 제1차 이프르 전투
10월 28일 독일 경순양함 SMS 엠덴, 영국령 페낭 항구 습격
10월 29일 오스만 제국 독일과의 동맹에 의거해 참전. 서부전선에서는 참호전 양상
11월 2일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 캅카스 방면 공세 시작
11월 6일 영국군이 오토만령 이라크에 상륙.
11월 7일 일본, 중국 칭다오에 있는 독일군 기지 함락
11월 9일 독일 경순양함 SMS 엠덴, 영국군에 격침
12월 25일 전후 크리스마스 휴전
1915년
날짜 사건
1월 19일 제1차 체펠린 호의 런던 공습
2월 19일 영국군, 다르다넬스에 있는 터키군 요새 폭격
4월 25일 갈리폴리 전투 시작
5월 7일 독일, U보트로 영국의 루시타니아 호 격침
5월 23일 이탈리아, 3국 동맹을 깨고 연합국에 참전. 전 동맹국인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
8월 5일 독일군, 러시아 제국령 폴란드의 바르샤바 점령
9월 25일 루스 전투 개시
12월 19일 연합국, 갈리폴리에서 후퇴
1916년
1월 27일 영국, 징병제 개시 (이전까지 지원 병제)
2월 16일 러시아군, 오스만 제국의 에르주룸 점령
2월 21일 베르됭 전투 시작
4월 15일 러시아군, 오토만 제국의 트레비존드 점령
4월 29일 메소포타미아의 영국군, 쿠트에서 오스만군에게 항복
5월 31일 유틀란트 해전
6월 4일 러시아군,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에 대해 브루실로프 공세 개시
7월 1일 솜 전투 시작
8월 10일 브루실로프 공세 성공적으로 종결
8월 29일 독일군 총참모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이 해임되고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취임.
9월 15일 영국군, 솜에서 세계 최초로 전차를 대량으로 운용
12월 7일 로이드 조지, 영국 수상이 됨
1917년
2월 1일 독일, 무제한 U보트 작전 개시
3월 8일 러시아에서 2월 혁명 발발, 니콜라이 2세 퇴위. 러시아 제정 붕괴, 임시정부 수립
3월 9일 러시아군의 캅카스 전선 붕괴.
3월 11일 영국군이 오토만 군을 격파하고 바그다드 점령. 오토만 제국은 페르시아 작전을 중단.
4월 6일 영국의 항구로 향하던 미국 수송선들이 U보트에 격침되자 미국, 독일에 선전포고
4월 9일 아라스 전투 시작
4월 16일 프랑스군, 니벨 공세를 시작하나 실패
7월 1일 러시아 임시정부, 케렌스키 공세를 실시하나 참패
7월 6일 이프르 부근에서 영국군이 공세를 감행한 메시네 전투 시작
7월 31일 제3차 이프르 전투 시작
10월 24일 카포레토 전투. 이탈리아군, 오스트리아군에 참패
11월 6일 영국군, 서부전선 공세 개시
11월 7일 러시아에서 10월 혁명, 임시정부 붕괴, 볼셰비키 집권
11월 10일 이탈리아군은 베네치아에서 30km떨어진 피아베 강까지 퇴각
11월 20일 캉브레에서 영국군이 전차 380대를 투입하여 승리
12월 5일 러시아-독일, 휴전하고 정전협상에 들어감
12월 9일 영국군, 오스만 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 점령
1918년
2월 18일 독일군, 러시아 공격 재개
3월 1일 독일군, 키예프 점령
3월 3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 러시아-독일 정전. 러시아, 연합국에서 공식 탈퇴
3월 21일 독일군, 솜에서 대공세
3월 29일 프랑스, 포슈 원수를 연합국 서부전선 최고사령관에 임명
4월 9일 독일군, 벨기에의 플랑드르 지역에서 공세 시작
5월 7일 독일-루마니아의 평화 조약 체결
7월 15일 제2차 마른 전투 개시, 독일군의 전선 붕괴 시작
9월 2일 독일군, 힌덴부르크 선으로 퇴각
9월 19일 영국군, 메기도 전투에서 승리
9월 26일 프랑스와 미군의 아르곤 공세 시작
9월 29일 불가리아, 연합국에 항복
10월 4일 독일, 연합국에 휴전요청
10월 17일 독일군의 힌덴부르크 선 붕괴
10월 24일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 개시. 이탈리아, 카포레토 전투에서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기 시작
10월 29일 킬 군항의 반란
10월 30일 오스만 제국, 연합국에 항복
11월 1일 영국군, 모술 점령
11월 3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연합국에 항복
11월 9일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 퇴위
11월 11일 독일, 연합국과 콩피에뉴 휴전협정(Compiegne armistice) 체결. 적대행위 공식적 종결
1919년
1월 4일 파리 강화 회의 열림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 체결
7월 21일 스캐퍼플로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

8.1. 연도별 주요 전투

연도 전투 이름
1914년 사라예보 사건
벨기에 침공
국경 전투
리에주 전투
탄넨베르크 전투
세르비아 전투
1차 마른 전투
제1차 아라스 전투
1차 이프르 전투
탕가 전투
사리카미스 전투
헬리골란트-바이트 해전
코로넬 해전
포클랜드 해전
크리스마스 휴전
1915년 제1차 비미 고원 전투
메소포타미아 전투
갈리폴리 전투
도거 뱅크 해전
고를리체-타르누프 전투
1916년 베르됭 전투
솜 전투
유틀란트 해전
브루실로프 공세
아랍 봉기
1917년 제2차 아라스 전투
니벨 공세
제2차 비미 고원 전투
파스샹달 전투
러시아 혁명
바그다드 함락
팔레스타인 전투
카포레토 전투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러시아의 연합군 탈퇴 및 동부전선 전쟁 종결)
춘계 공세[63]
2차 마른 전투
2차 솜 전투
백일 전투
뮤즈-아르곤 전투
무드로스 정전 협정(오스만 제국)
킬 군항의 반란(독일 11월 혁명과 독일의 항복 선언)
  • 아프리카 전선은 워낙 따로 놀았던 고로, 별도 항목에서 기술한다. 제1차 세계 대전/아프리카 전선 참조.

9. 사용 장비

제1차 세계대전기의 연합군 보병장비
개인화기 소총 볼트 / 레버 / 폴링 블록

마티니-헨리 소총, 리-엔필드, P14, 르벨 M1886, 베르티에, 모신나강, 베르단, 카르카노, 30/38식 소총, 스프링필드 M1903, 윈체스터 M1895
반자동 레밍턴 모델 8, 윈체스터 1907 SL, 뫼니에 M1916, RSC M1917/18, 브리티쉬 1918 파콰르-힐 소총
자동 리베롤 1918, M1907/17, 체이-리고티 자동소총, 페도로프 자동소총, M1918 브라우닝
기관단총 / 산탄총 MAB 18, 윈체스터 M1897/12, Auto-5, 레밍턴 모델 10
권총 리볼버 웨블리, MAS 1873, 보데오 M1889, Mle 1892, 26년식 권총, 나강 M1895, M1917
자동권총 마스, FN M1900, FN M1903, 콜트 M1903, 새비지 M1907, FN M1910, 리센티 M1910, 콜트 M1911, 루비, 스타 M1914, 베레타 M1915/17
지원화기 기관총 경기관총 마드센 M1902, 루이스 경기관총, 호치키스 M1909, CSRG M1915, 휴오트 자동소총
중기관총 맥심 기관총, 빅커스 기관총, 호치키스 기관총, 3년식 기관총, 피아트-레벨리 M1914, M1917 브라우닝
박격포 2인치 중박격포, 3인치 스토크스 박격포
유탄 F1 수류탄, 밀즈 수류탄, RG-14
경야포 빅커스 Q.F. Gun, Mk II
냉병기 도검 구군도, M1902 세이버, 트렌치 나이프
제1차 세계대전기의 동맹군 보병장비
개인화기 볼트액션 소총 게베어 1871, 게베어 1888, 게베어 1898, 만리허 M1893/95, 만리허-쇠나워
반자동소총 / 기관단총 젤프스트라더 M1906, 몬드라곤 M1908, 젤프스트라더 M1916, 헬리겔 1915, MP18
권총 독일제 라이히 M79/83, 마우저 C78, 보르하르트 C93, 마우저 C96, 드라이제 M1907, 루거 P08, 마우저 M1910/14
오스트리아-헝가리제 라스트&가서 M1898, 로트-슈타이어 M1907, 슈타이어 M1912, 프로머 슈토프
지원화기 기관총 경기관총 마드센 M1902, 호치키스 M1909, MG15nA, MG08/15, MG08/18, MG14/17
중기관총 호치키스 M1900, 스코다 M1909, 슈바르츠로제 M.07/12, MG08
대전차화기 탕크게베어 M1918
화염방사기 벡셀아파라트 M1917
박격포 그라나트베르퍼 16
제1차 세계대전기의 연합군 기갑장비
전차 중전차/지상함 리틀 윌리, Mk. I, Mk. II, Mk. III, Mk. IV, Mk. V
중형전차 생 샤몽, 슈나이더 CA1, Mk. A 휘펫, Mk. B, Mk. C 호넷
경전차 르노 FT-17, M1917 경전차, 포드 3t 전차
프로토타입 중전차/지상함 Mk. VI, 피아트 2000, 플라잉 엘레펀트, 차르 탱크, 베즈데코드, 홀트 가스-일렉트릭, FCM 1A
자주포 건 캐리어 시리즈
탱켓 모리스-마르텔 탱켓
장갑차 푸틸로프 – 가포드 장갑차, 푸조 146, 르노 ED, 오스트로-다임러 장갑차, Ml. IX, 오스틴 장갑차, 롤스로이스 장갑차, 데이빗슨 캐딜락, 킹 장갑차, 란체스터 장갑차, 피어리스 장갑차, 화이트 장갑차, 테르니 장갑차
자주포 건 캐리어 Mk. I, 240mm 캐터필러 자주포, M1919 16인치 자주포
제1차 세계대전기의 동맹군 기갑장비
전차 중전차 A7V
프로토타입 LK I, LK II, A7V, A7VU, 슈투름바겐, 트레파스바겐, 그로스캄프바겐, PzZug II 장갑열차, 오리온바겐, 오버슐레지엔
노획전차 Mk. IV, Mk. A 휘펫, FT-17
장갑차 E-V/4 에르하르트, P.A.1, 오스트로-다임러 장갑차, 란치아 안살도 강갑차, 뷔싱 A5P, 롬펠 장갑차
제1차 세계대전의 연합군 항공기
전투기 영국 에어코 DH.2, RAF F.E.8, 숍위드 펍, RAF S.E.5, 솝위드 삼엽기, 솝위드 카멜, 솝위드 스나이프
프랑스 Morane-Saulnier L, Morane-Saulnier N, 뉴포르 시리즈, 스패드
폭격기 경 폭격기 RAF R.E.8
중 폭격기 핸들리 페이지 폭격기 시리즈, 빅커스 비미, 일리야 무로메츠, Caudron G.4,카프로니 시리즈
기타 항공기 샘슨 2
제1차 세계대전의 독일 제국군 항공기
전투기 포커 아인데커, 알바트로스 D시리즈, 할버스타트 시리즈, 포커 Dr.1, 지멘스 슈커트 시리즈, 포커 D.VII
폭격기 타우베, 고타 G IV, AEG G.IV
기타 항공병기 체펠린 비행선

10. 관련 항목

10.1. 관련 용어

  • 국제 연맹
  • 파리 강화 회의
  • 내부로부터의 중상
  • 뇌이 조약
  • 민족자결주의
  • 러시아 혁명
  • 로잔 조약
  • 베르사유 조약
  • 생제르맹 조약
  • 세브르 조약
  • 슐리펜 계획
  • 치머만 전보
  • 트리아농 조약
  • 무제한 잠수함 작전

10.2. 관련 인물

기껏해야 20년 정도의 전간기 이후 다시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기 때문에 상당수의 인물들이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인물들과 겹친다. 제2차 세계 대전기의 지도자나 군인들이 이 시기에는 어떤 위치였는지도 보면 흥미로운 부분.

10.2.1. 연합국

  • 영국
    • 더글러스 헤이그
    •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 윈스턴 처칠
    •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
    • 존 로널드 루엘 톨킨 – 우리가 잘아는 소설가 맞다. 솜 전투에 참전했다가 자신은 병에 걸려 죽을 뻔 하고 나머지 같이 참전한 친구들은 모두 전사했다.
    • 키스 파크 – 안작군 소속으로 갈리폴리 상륙작전에 참전하고 이후 영국 육군으로 솜 전투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고 이후 항공부대로 전입한다. 이후 2차 세계 대전에서는 영국 본토 항공전과 몰타 항공전등을 지휘했다.
  • 프랑스 제3공화국
    • 레몽 푸앵카레
    • 르네 퐁크
    • 샤를 드 골
    • 조르주 클레망소
    • 페르디낭 포슈
    • 프랑수아 다를랑
    • 앙리 필리프 페탱
  • 러시아 제국(~1917)-러시아 연방 임시정부(1917)-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1917~)
    • 니콜라이 2세
    • 니콜라이 대공
    • 레프 트로츠키
    •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 블라디미르 레닌
    •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 알렉산드르 콜차크
    •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 미국
    • 더글러스 맥아더
    • 어니스트 헤밍웨이
    • 우드로 윌슨
    • 존 조지프 퍼싱
    • 체스터 니미츠
    • 해리 S. 트루먼[64]
    • 조지 S. 패튼
  • 이탈리아
    • 베니토 무솔리니

10.2.2. 동맹국

  • 독일 제국
    • 마타 하리[65]
    • 막스 호프만
    •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
    • 빌헬름 2세
    • 소 몰트케
    •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 아돌프 히틀러
    • 에르빈 롬멜
    • 에른스트 우데트
    • 에리히 루덴도르프
    • 파울 폰 힌덴부르크
    • 한스 폰 젝트
    • 헤르만 괴링
    •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 소설가로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썼다.
  • 오스만 제국
    • 이스마일 엔베르
    •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 탈라트 파샤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베르히톨트
    • 프란츠 요제프 1세
    •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 호르티 미클로시[68]
    •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

10.3. 창작물

10.3.1. 소설・영상물

  • 갈리폴리
  • 거인들의 몰락 – 켄 폴릿 지음. 1차 대전 직전의 유럽과 미국의 상황을 그린 대하 소설이며 2차 대전과 냉전을 다룬 후속작도 있다.
  • 고독의 우물 – 래드클리프 홀 지음. 1차 대전 당시 앰뷸런스 부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라파예트(원제 flyboys)
  • 무기여 잘 있거라
  • 서부전선 이상없다
  • 강철 폭풍 속에서
  • 아라비아의 로렌스
  • 에덴의 동쪽 – 전쟁영화는 아니지만 이 시기를 배경으로 미국 사회의 분위기를 그리고 있으며 극중 인물들에게 큰 영향을 준다.
  • 정무문 100대1의 전설
  • 인게이지먼트(A very long engagement)
  • 8월의 포성(원제 The Guns of August)
  • 파스샹달
  • 60고지 전투
  • 워호스
  • 워터 디바이너
  • 로스트 바탈리온
  • 레드바론
  • 대야망(the blue max)
  • 메리 크리스마스
  • 데스워치(영화)
  • 영광의 길
  • 버드송(bird song, 2012)
  • 37 데이즈(37 Days, 2014, BBC 3부작)
  • 더 크림슨 필드(The Crimson Field, 2014, BBC 6부작)
  • 아워 월드 워(Our World War, 2013, BBC 3부작)
  • 더 패싱 벨스(The Passing Bells, 2014, BBC 5부작)
  • 앤잭 걸스(Anzac Girls, 2014, 호주 ABC)
  • 사라예보 1914(Das Attentat – Sarajevo 1914, 2014, ZDF 2부작)
  • 원더우먼(Wonder woman, 2017)

10.3.2. 게임

  • 네크로비전
  • 다크스트 오브 데이즈
  • 더 그레이트 마션 워
  • 라스트 익스프레스
  • 라이즈 오브 플라이트
  • 발리언트 하츠 : 더 그레이트 워
  • 배틀필드 1
  • 베르됭(게임)
  • 빅토리아
  • 아이언 스톰
  • 암네시아: 어 머신 포 피그스
  • 어쌔신 크리드: 신디케이트
  •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대체역사물MOD)
  • 토이 솔져스
  • 플레임즈 오브 워 – Great War 확장
  • A&A 1914 (보드게임)
  • european war 3
  • Warfare 1917
  • 영광의 길(보드게임)
  • 월드 오브 워쉽

10.3.3. 대체역사물

  • 카이저라이히
    이 또한 2차 대전에 밀려서 존재감이 미미한 편이다. 2차 대전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뒤바뀌었더라면 극악무도한 파시즘이 전세계를 장악한다는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이 나왔겠지만 1차 대전에선 상대적으로 그 정도로 극적인 결과가 도출되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차 대전에서 독일 역시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프랑스를 무장해제 시켜 괴뢰국으로 만들 계획이었음이 밝혀지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선 2차 대전기 독일의 A-A 선에 맞먹는 영토를 삥뜯었으며 훗날의 국방군과 마찬가지로 민간인 상대로 무차별 학살을 행했던 것을 보면 독일 제국은 나치 독일의 선배임이 부끄럽지 않은 충분한 악당 국가다. 그리고 패전에 의해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제국과, 그들로 대표되는 민주주의의 몰락은 세계를 급속히 무질서 상태로 만들었을 것이고 이로 인해 발생할 결과는 현실의 역사에 비해 만만치 않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을 뿐이다. 현실에서는 1차 대전으로 인해 군주정이 몰락했지만 군주정을 대표하는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승리하여 살아남았다면 민주주의는 훨씬 후퇴했을 것이다.
  • 레비아탄, 베헤모스, 골리앗 – 스콧 웨스터펠드 지음. 기계 병기로 싸우는 동맹국과 생체 병기로 싸우는 협상국 사이에서 오스트리아의 숨겨진 어린 황태자가 주인공인 대체역사소설. 아쉽게도 국내엔 미번역된 작품이다.

11. 관련 어록

이봐, 전우여, 난 자넬 죽이고 싶지 않았어. 자네가 참호에 또다시 뛰어들더라도 얌전히만 있으면 죽이지 않을 거야. 난 자네가 뛰어들 때 자네의 수류탄을, 자네의 총검을, 자네의 무기만을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 난 자네의 얼굴을 보고 자네의 아내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공통점을 발견했어, 전우여! 부디 나를 용서해다오! 우리는 이러한 공통점을 너무 늦게 깨닫고 말지. 자네들 어머니들도 우리의 어머니들처럼 근심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죽음과 고통을 똑같이 두려워하며 똑같이 죽어 간다는 사실을 말이야. 전우여! 어째서 그대가 나의 적이 되었던가. 우리가 무기와 군복을 벗어 던지면 자네도 나의 벗이 될 수 있을 텐데…

–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없다

참호에 있는 군인들에게 왜 전쟁을 하는지 물었다. 사라예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굴복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답이 나왔다. 독일이 왜 우리와 전쟁을 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모든 전쟁을 끝내는 전쟁이 될 것. 하지만 더 다이나믹한 속편이 남아있다
– 영국의 저명한 과학소설 저술가였던 허버트 조지 웰즈[82]

우리가 전쟁을 끝내지 않으면 전쟁이 우리를 끝낼 것이다.[83]
– 전쟁 뒤, 허버트 조지 웰즈.

인간은 미쳤다! 현 사태를 지속한다는 것은 미친 것임에 틀림없다. 이 지독한 살육전이라니! 이 끔찍한 공포와 즐비한 시체를 보라! 내가 받은 인상을 전달할 말을 찾을 수가 없다. 지옥도 이렇게 끔찍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은 미쳤다!
– 프랑스 보병 중위 알프레드 주베르가 사망하기 전에 적은 일기(1916년 5월 23일). 출처는 <참호에서 보낸 1460일>.

The lamps are going out all over Europe, we shall not see them lit again in our life-time
온 유럽의 등불이 꺼져가고 있다. 우리 생전에 다시 켜지는 일은 없겠지.
– 영국 외무장관 에드워드 그레이(Sir Edward Grey)가 1914년 8월 3일 영국의 참전 결정 후, 그의 친구에게.

More than 60 million soldiers fought in The War to End All Wars.
6천만 명 이상의 병사들이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에 참전했다.

It ended nothing.
하지만 아무것도 끝내지 못했다.

Yet it changed the world forever.
다만, 세계를 영원히 바꿔 놓았다.

배틀필드 1 캠페인 인트로

너무도 오랜 시간이 지나,
그 시신조차 이제는 덧없는 먼지가 되었지만,
그 희생만큼은 아직도 살아숨쉬고 있다.

우리는 그 기억을 항상 간직하며 절대 잊어서는 안되리라…

발리언트 하츠 : 더 그레이트 워 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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