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 역사

제1차 세계대전 역사

제1차 세계 대전 (World War I, WWI 또는 WW1)은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일어난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세계 대전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단순히 세계 대전(World War) 또는 대전(Great war)라고 불렸다.[5][6][7] 미국에서는 처음에 유럽 전쟁(European War)라고 불렸다.[8]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병사 900만명 이상이 사망했다. 기술 및 산업의 고도화와 전술적 교착 상태로 인해 사상자 비율이 악화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사망자가 가장 많았던 전쟁 중 하나이며, 참전국의 수많은 혁명 등을 포함하여 주요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9]

이 전쟁은 전 세계의 경제를 두 편으로 나누는 거대한 강대국들의 동맹끼리의 충돌이다.[10] 한쪽 편은 대영제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의 삼국 협상을 기반으로 한 협상국이며, 다른 한편은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있는 동맹국이다. 이탈리아 왕국은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함께 삼국 동맹에 가입되어 있었지만 동맹국에 참여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협상국의 일원으로 참가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침공했다. 이러한 동맹은 재조직되었고 더 많은 국가가 전쟁에 참여하도록 압력을 가하면서 확장되었다.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미국이 연합국에 가입했으며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왕국이 동맹국에 가담했다. 궁극적으로 6천만명의 유럽인을 포함한 7천만명의 군인이 전쟁에 가담하면서 역사적으로 가장 큰 전쟁 중 하나에 동원되었다.

이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신제국주의때문이었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왕위 후계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세르비아 국민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게 최후 통첩을 내리면서 7월 위기가 시작되었고,[14][15] 지난 수십년에 걸쳐 형성된 국제적 동맹끼리 서로 연결되었다. 수주 이내에 강대국끼리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이 분쟁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를 침공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러시아가 동원령을 내리면서 독일군은 중립국인 룩셈부르크와 벨기에를 침공하면서 프랑스로 진격했고, 이로 인해 영국이 독일에게 선전포고했다. 파리 앞에서 독일군의 진격이 멈춘 이후, 서부 전선은 1917년까지 참호전과 같은 소모전 양상으로 굳어지게 된다. 한편, 동부 전선에서는 러시아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로 진격하는데는 성공했지만 동프로이센 침공은 독일군의 반격으로 실패하게 된다. 1914년 11월에는 오스만 제국이 참전하면서 전역이 코카서스, 메소포타미아, 시나이 반도 등으로 확대되게 된다. 이탈리아와 불가리아는 1915년 참전했고, 루마니아 왕국은 1916년 참전했으며, 미국은 1917년 참전했다.

러시아 정부가 1917년 3월 붕괴된 이후 동부 전선이 해소되었으며 이후 10월 혁명으로 인해 동맹국이 러시아의 영토를 획득했다. 1918년 11월 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휴전에 합의했다. 1918년 서부 전선에서 독일군의 춘계 공세 이후, 연합군은 일련의 공세를 방어하고 이후 진격하여 독일군의 참호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독일 11월 혁명 이후, 독일이 1918년 11월 11일 휴전에 합의하면서 연합국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 등 4개 주요 제국이 해체되게 되었다. 앞의 2개 제국은 승계국가가 탄생했지만 많은 영토를 잃었으며, 후자의 2개 제국은 완전히 해체하게 되었다. 유럽 및 서남아시아의 지도는 새로운 독립 국가가 생기면서 새롭게 그려지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끔찍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국제 연맹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목표는 유럽의 민족주의의 부활과 독일에서 파시즘의 장악으로 인해 상황이 악화되며 실패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하게 되었다.

명칭

1914년 10월 캐나다의 잡지 맥클린스에서는 “어떤 전쟁은 스스로 이름을 붙인다. 그것이 대전(Great War)이다”라고 말했다.[18] 1914년 말 뉴욕에서 발행한 전쟁의 기원 및 초기 역사에 관한 책의 제목은 “세계 대전”(World War)라는 이름으로 붙여졌다.[19] 전간기 기간 동안, 영미권에서는 이 전쟁을 세계 대전(World war) 또는 대전(Great war)라고 불렀다.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용어는 1914년 9월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헤켈이 “‘유럽 전쟁’의 두려움에 관한 과정이나 성격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단어의 전체적 의미에서 이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이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시작되었다.[20] 또한,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말은 장교이자 저널리스트인 찰스 아 코르트 레핑턴(Charles à Court Repington)이 지은 1920년대 역사책의 제목이기도 했다.[21]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말이 보편화되었으며 캐나다와 영국에서는 ‘First World War’이라는 용어를, 미국에서는 ‘World War I’이라는 용어로 사용한다.

배경

정치 및 군사적 동맹

19세기 유럽의 강대국들은 유럽 전역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며 그 결과 1900년에는 복잡한 정치, 군사적 동맹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되었다.[11] 이 동맹은 1815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간의 신성 동맹으로부터 시작했다. 1873년 10월에는 독일의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사이 삼제 동맹(Dreikaiserbund)을 체결했다. 이 동맹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 간에 발칸반도에 대한 정책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1879년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삼제 동맹에 탈퇴하여 독오 동맹을 따로 만들었다. 한편, 오스만 제국의 발칸반도에 대한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약화되면서 발칸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반대로 증가하게 되었다.[11] 이 독오 동맹은 1882년 이탈리아 왕국이 가입하면서 삼국 동맹으로 변화했다.[22]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군사 동맹 지도. 협상국은 초록색으로 나타냈으며, 동맹국은 갈색으로 나타냈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 러시아 두 나라간의 양면전선 전쟁을 피하기 위해 독일과 러시아간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빌헬름 2세가 독일의 황제 지위에 오르면서 비스마르크는 퇴위를 강요당했고 비스마르크가 세운 동맹 시스템은 점차 해체되었다. 예를 들어, 빌헬름 2세는 1890년 러시아와의 재보장 조약 갱신을 거부했다. 2년 후, 3제 동맹을 막기 위하여 러불 동맹이 체결되었다. 1904년,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영불 협상(Entente Cordiale)을 맺었으며 1907년에는 영국이 영러 협상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공식적으로 영국-프랑스-러시아 동맹으로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프랑스나 러시아가 분쟁을 겪을 경우 영국이 참가하게 된다는 항목이 있었으며, 이러한 양자 연동 협정을 삼국 협상으로 알려졌다.[11]

군비 경쟁

1871년 보불전쟁에서 독일이 승리하여 독일이 통일한 이후, 산업 및 경제력이 급상승하게 되었다. 1890년대 중반부터 빌헬름 2세는 중요한 경제 자원을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가 지휘하는 독일 제국해군에 투자하여 영국 해군과 해군 군비 경쟁을 하게 되었다.[23] 그 결과, 각 국가들은 주력함을 더욱 많이 건조하기 위해 노력했다. 1906년 HMS 드레드노트의 건조 이후 대영제국은 독일 제국과의 경쟁에서 중요한 위치를 선점하게 되었다.[23] 영국과 독일 사이의 군비 경쟁은 모든 유럽 주요국이 유럽 전역의 분쟁에 필요한 장비와 무기를 생산하는 데 산업 기반을 기울이면서 유럽 전역으로 경쟁이 확장되었다.[24] 1908년부터 1913년까지 유럽 국가의 군비 지출은 50% 상승했다.

1908년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 병합을 선포하는 포스터를 읽는 사라예보 시민.

발칸 반도의 분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과거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1878년 이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점령한 이후 1908년부터 1909년까지 보스니아 위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이 점령으로 세르비아 왕국 및 그 국가의 후원자인 범슬라브주의 동방 정교회의 러시아 제국을 화나게 했다.[26] 이 지역에서 러시아의 행보는 이미 “유럽의 화약고”로 널리 알려진 발칸반도의 균형을 붕괴시켜 평화 협정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26] 1912년부터 1913년까지 발칸 동맹과 오스만 제국 사이의 전쟁인 제1차 발칸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 결과 체결된 런던 조약에서 알바니아는 독립했으며, 불가리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그리스는 영토를 확대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감소했다. 1913년 6월 16일, 불가리아가 세르비아 및 그리스를 침공하면서 발발한 33일간의 제2차 발칸 전쟁에서는 불가리아가 패배하여 세르비아와 그리스에게 마케도니아 대부분을, 루마니아에게 남 도르부자를 빼앗기게 되었으며 발칸반도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서막

이 사진은 일반적으로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체포당하는 사진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일부는[28][29] 사건 당시 방관자였던 페르디난드 베흐를 찍은 사진이라고 주장한다.

사라예보 사건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세르비아의 검은 손이 지원하는 청년 보스니아 민족주의 단체의 암살단 6명 쳬베코 포포비치(Cvjetko Popović),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 무함마드 메메드바시치(Muhamed Mehmedbašić), 네델코 카브리노비치(Nedeljko Čabrinović), 트리프코 그라베츠(Trifko Grabež), 바소 쿠브릴로비치(Vaso Čubrilović)는 대공의 차량 행렬이 지나가는 거리에 서 있었다. 카브리노비치가 차에 수류탄을 던졌지만 차를 놓쳤다. 근처의 군중 몇몇이 부상을 입었고,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차는 계속 움직일 수 있었다. 다른 암살단은 차가 빠르게 지나쳐 암살할 수 없었다. 약 한시간 후,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 병원을 방문하고 돌아올 때 길을 잘못 들려 우연히 프린치프가 서는 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프린치프는 권총을 발사해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그의 아내 호엔베르크 여공작 조피가 사망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내에서 사람들의 반응은 거의 무관심한 듯 가벼운 반응을 보였다. 역사학자 즈비네크 제만(Zbyněk Zeman)은 나중에 “이 사건은 거의 어떠한 인상도 주지 못했다. 일요일과 월요일(6월 28일~29일)에 빈의 군중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음악을 듣고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라고 전했다.

1914년 6월 29일 사라예보 반세르비아 폭동의 여파로 거리에 모여든 군중.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폭력 사태의 확대

그러나, 사라예보 내에서는 오스트리아 정부가[32][33] 세르비아 주민들에 대한 폭력을 하도록 부추겼고, 그 결과 사라예보의 크로아티아인과 보스니아인이 세르비아인 두명을 죽이고 세르비아인 소유의 건물을 불태우는 사라예보 반세르비아 폭동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포그롬의 특성을 갖추었다. 작가 이보 안드리치는 “사라예보에서 증오의 열풍이 불었다”라면서 이런 폭력 사건에 대해 말했다.[34] 세르비아 민족에 대한 폭력 행위는 사라예보에서 뿐 아니라 현대의 크로아티아 및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영토에 위치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대도시에서도 일어났다.[35]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유명한 세르비아인 5,500명을 수감하고 송환했으며, 그 중 700명에서 2,200명이 감옥에서 사망했다고 통계내렸다. 세르비아인 460명은 사형 선고가 내려졌고, 이슬람교가 지배적이었던 지역에서는 슈츠크롭스(Schutzkorps)라는 민병대 집단이 형성되어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핍박을 시작했다.[39]

7월 위기

사라예보 암살 사건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프랑스 제국, 대영제국 간 1달 간의 외교 기동으로 이끌어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의 관리(특히 검은 손 조직의 임원들)들이 이 사건과 관련되었다고 판단하고 보스니아 내에서 세르비아의 영향을 줄이기 위해[40] 세르비아에게 의도적으로 전쟁을 자극할 10가지 요구 사항으로 구성된 7월 최후통첩을 보냈다.[41] 세르비아가 10가지 요구사항 중 8가지만 수락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14년 7월 28일 전쟁을 선포했다. 군사역사가인 헤우 스트라첸은 “세르비아의 초기 모호한 응답에 관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행동에 차이를 주었을 것인지 아닌지는 의심해야 한다. 프란츠 페르디난드 대공은 그리 인기있는 성격은 아니였으며 제국은 그의 죽음에 그렇게 애도를 표하지는 않았다”라고 말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발칸 반도의 영향력을 넓히는 것을 내키지 않고 세르비아 왕국의 오랜 지원국이었던 러시아 제국은 7월 29일 부분 동원령을 명령했다.[22] 7월 30일 러시아 제국이 총동원령을 내리자, 같은 날 독일 제국은 동원령을 발동했다.[43] 독일은 베를린의 대사를 통해 러시아에게 12시간 내에 동원령을 해제하지 않으면 전쟁 상황이 올 것이라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43] 러시아는 동원령을 해제하는 것에 협상하자는 응답을 보냈다. 그러나, 독일 제국은 협상을 거부하고 1914년 8월 1일 러시아에게 선전포고했다.

독일의 전쟁계획인 슐리펜 계획은 러시아가 동부에서 진군하기 전에 프랑스 지역을 빠르고 대규모로 침공해서 서부를 미리 제압한다는 전략이었다. 따라서, 러시아의 동원령 선포와 동시에 독일 제국은 프랑스에게 중립을 유지하라는 요구를 보냈다. 프랑스 내각은 즉시 군사 동원령을 내리라는 군의 압박에 저항하여 사건을 막기 위해 프랑스 국경에서 10 km 밖으로 군대를 철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독일 제국은 8월 2일 룩셈부르크를 침공했으며, 8월 3일에는 독일 제국이 프랑스에게 선전포고했다.[43] 8월 4일, 벨기에가 자국의 영토를 통해 프랑스를 침공하려는 것에 대해 거부하자 독일 제국은 벨기에게도 선전포고했다.[43][44][45] 영국은 벨기에의 중립 상태를 유지하라는 최후통첩을 독일 제국이 무시하자, 1914년 8월 4일 독일 제국에게 선전포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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