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제1차 세계대전 참전(1917년)

미국 제1차 세계대전 참전(1917년)

1912년 대통령 선거는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에게로 승리가 돌아갔다.

그는 대학교수 출신의 자유주의자였다. 그의 당선 이유는 그가 내세운 ‘자유주의’의 슬로건 보다는 공화당의 내분이었다.

정계를 떠났던 루스벨트가 진보당을 만들어 선거전에 뛰어드는 바람에 공화당 표는 루스벨트와 태프트로 양분되었으며 이 틈에 민주당 후보 윌슨이 어부지리로 당선된 것이다.

1914년 7월 28일 유럽에서 대전이 발발하자 윌슨은 미국이 “사고와 행동에 있어 엄정한 중립을 지킬 것”이라고 선언했다. 윌슨의 이 중립정책은 독립 이래 미국 대외정책의 기본원칙이었으며 고립주의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유럽이 미국 또는 아메리카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한 미국도 유럽의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미국 참전 안했으면 1차 대전서 독일 승리했을 것

여기에는 윌슨의 이상주의적 경향도 한 몫했다. 그는 도덕적이고 평화적인 미국이 열강의 이권다툼에 개입하는 것은 스스로의 명예를 더럽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은 19세기 말 이래 문호개방정책이라는 이름 아래 식민지 쟁탈전에 가담하고 있었다. 더구나 미국은 중립을 내세우면서도 순수한 무역거래라는 미명하에 연합국측에 막대한 양의 전쟁물자를 공급하고 있었다.

전쟁 초기 미국의 이같은 애매한 태도는 1915년 5월 루시타니아 호 격침사건으로 많은 미국인이 희생된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영국의 호화 여객선 루시타니아 호가 아일랜드 근해에서 독일 잠수함에 격침되어 미국인 128명을 비롯, 승객 1,1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미국에는 참전여론이 비등했으나 윌슨은 외교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여 미국이 대전에 직접 개입되는 것만은 피하고자 했다. 독일이 이를 사과하고 이같은 사건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밝히면서 위기는 가까스로 해소될 수 있었다.

전쟁이 3년째로 접은 1916년 윌슨은 민주당 후보로 재차 대통령에 출마하여 무난히 당선되었다. 선거 유세 중 그는 대내적 혁신정치와 대외 중립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윌슨은 취임 후 첫 의회연설에서 ‘승리없는 평화’를 외치며 대전의 조속한 종결을 촉구했다. 후일 파리강화회의에서 그는 ‘승리없는 평화’를 보다 구체화한 ‘14개 원칙’을 주장했다.

윌슨의 이런 평화노력도 1917년 2월 1일 독일이 발표한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독일은 무제한 잠수 작전이 미국의 참전을 불러오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은 작전이 제대로만 이뤄지면 미국이 참전하기 전 또는 참전하더라도 미군 주력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으로 계산했다.

윌슨은 이를 독일의 직접적 도발로 간주, 즉시 독일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2월 하순에는 소위 ‘짐머만 문서’가 알려지며 엄청난 파문이 일었다. 짐머만 독일 외상이 멕시코 정부에 전달한 이 비밀문서에서 독일은 미국이 참전할 경우 멕시코가 독일편에 가담해준다면 그 대가로 미국령 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를 넘겨주겠다고 제의했다. 이것이 미국 내 여론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 것인지는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유럽시대 종료하고 미국이 세계 중심 되는 역사적 사건

미국의 참전을 몰고온 직접적 사태는 1917년 3월의 러시아 혁명이다. 러시아 혁명정부는 즉시 ‘제국주의 국가들의 전쟁’을 그만두기로 결정했고 이에 따라 독일은 서부전선에 공격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이러면 독일의 승리는 시간문제였다. 이것은 미국의 국익상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윌슨 대통령은 4월 2일 의회에 참전 승인을 요청했다. 교서에서 그는 “민주주의 수호와 세계의 항구한 평화를 위해” 미국의 참전이 불가피하다는 것과 이 전쟁이 “지구상의 모든 전쟁을 종식시키는 최후의 전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4월 6일 의회는 만장일치로 대통령의 요청을 승인함으로 미국은 드디어 대전에 뛰어들었다.

강대국 미국의 잠재력은 엄청났다. 초기에는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 위력을 발휘해 미국의 참전에도 불구하고 독일에게 전황이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미국이 전시체제로의 전환을 완료한 1918년에 이르러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그해 3월부터 7월에 걸쳐 독일은 파리함락을 목표로 네 차례의 대공세를 감행했으나 연합군의 완강한 저항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제는 연합군이 공세로 나설 차례였다. 엄청난 희생을 치른 끝에 그해 9월 독일이 최후의 방어선으로 설정한 힌덴부르크 방어선이 돌파되었다. 2일 후 연합국의 휴전제의를 독일이 받아들임으로 4년 간의 대전은 끝났다.

미국의 참전이 없었더라면 1차대전은 아마 독일의 승리로 막을 내렸을 것이다. 미국의 참전은 단순히 연합국측이 승리했다는 사실에 그 의미가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명실상부한 최강대국임을 만방에 선포한데 있다. 이는 곧 오랫동안 계속되어온 유럽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대신 미국이 세계정치의 중심에 서게 되었음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이었다.1912년 대통령 선거는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에게로 승리가 돌아갔다. 그는 대학교수 출신의 자유주의자였다. 그의 당선 이유는 그가 내세운 ‘자유주의’의 슬로건 보다는 공화당의 내분이었다. 정계를 떠났던 루스벨트가 진보당을 만들어 선거전에 뛰어드는 바람에 공화당 표는 루스벨트와 태프트로 양분되었으며 이 틈에 민주당 후보 윌슨이 어부지리로 당선된 것이다. 1914년 7월 28일 유럽에서 대전이 발발하자 윌슨은 미국이 “사고와 행동에 있어 엄정한 중립을 지킬 것”이라고 선언했다. 윌슨의 이 중립정책은 독립 이래 미국 대외정책의 기본원칙이었으며 고립주의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유럽이 미국 또는 아메리카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한 미국도 유럽의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미국 참전 안했으면 1차 대전서 독일 승리했을 것 여기에는 윌슨의 이상주의적 경향도 한 몫했다. 그는 도덕적이고 평화적인 미국이 열강의 이권다툼에 개입하는 것은 스스로의 명예를 더럽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은 19세기 말 이래 문호개방정책이라는 이름 아래 식민지 쟁탈전에 가담하고 있었다. 더구나 미국은 중립을 내세우면서도 순수한 무역거래라는 미명하에 연합국측에 막대한 양의 전쟁물자를 공급하고 있었다. 전쟁 초기 미국의 이같은 애매한 태도는 1915년 5월 루시타니아 호 격침사건으로 많은 미국인이 희생된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영국의 호화 여객선 루시타니아 호가 아일랜드 근해에서 독일 잠수함에 격침되어 미국인 128명을 비롯, 승객 1,1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미국에는 참전여론이 비등했으나 윌슨은 외교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여 미국이 대전에 직접 개입되는 것만은 피하고자 했다. 독일이 이를 사과하고 이같은 사건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밝히면서 위기는 가까스로 해소될 수 있었다. 전쟁이 3년째로 접은 1916년 윌슨은 민주당 후보로 재차 대통령에 출마하여 무난히 당선되었다. 선거 유세 중 그는 대내적 혁신정치와 대외 중립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윌슨은 취임 후 첫 의회연설에서 ‘승리없는 평화’를 외치며 대전의 조속한 종결을 촉구했다. 후일 파리강화회의에서 그는 ‘승리없는 평화’를 보다 구체화한 ‘14개 원칙’을 주장했다. 윌슨의 이런 평화노력도 1917년 2월 1일 독일이 발표한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독일은 무제한 잠수 작전이 미국의 참전을 불러오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은 작전이 제대로만 이뤄지면 미국이 참전하기 전 또는 참전하더라도 미군 주력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으로 계산했다. 윌슨은 이를 독일의 직접적 도발로 간주, 즉시 독일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2월 하순에는 소위 ‘짐머만 문서’가 알려지며 엄청난 파문이 일었다. 짐머만 독일 외상이 멕시코 정부에 전달한 이 비밀문서에서 독일은 미국이 참전할 경우 멕시코가 독일편에 가담해준다면 그 대가로 미국령 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를 넘겨주겠다고 제의했다. 이것이 미국 내 여론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 것인지는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유럽시대 종료하고 미국이 세계 중심 되는 역사적 사건 미국의 참전을 몰고온 직접적 사태는 1917년 3월의 러시아 혁명이다. 러시아 혁명정부는 즉시 ‘제국주의 국가들의 전쟁’을 그만두기로 결정했고 이에 따라 독일은 서부전선에 공격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이러면 독일의 승리는 시간문제였다. 이것은 미국의 국익상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윌슨 대통령은 4월 2일 의회에 참전 승인을 요청했다. 교서에서 그는 “민주주의 수호와 세계의 항구한 평화를 위해” 미국의 참전이 불가피하다는 것과 이 전쟁이 “지구상의 모든 전쟁을 종식시키는 최후의 전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4월 6일 의회는 만장일치로 대통령의 요청을 승인함으로 미국은 드디어 대전에 뛰어들었다. 강대국 미국의 잠재력은 엄청났다. 초기에는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 위력을 발휘해 미국의 참전에도 불구하고 독일에게 전황이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미국이 전시체제로의 전환을 완료한 1918년에 이르러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그해 3월부터 7월에 걸쳐 독일은 파리함락을 목표로 네 차례의 대공세를 감행했으나 연합군의 완강한 저항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제는 연합군이 공세로 나설 차례였다. 엄청난 희생을 치른 끝에 그해 9월 독일이 최후의 방어선으로 설정한 힌덴부르크 방어선이 돌파되었다. 2일 후 연합국의 휴전제의를 독일이 받아들임으로 4년 간의 대전은 끝났다. 미국의 참전이 없었더라면 1차대전은 아마 독일의 승리로 막을 내렸을 것이다. 미국의 참전은 단순히 연합국측이 승리했다는 사실에 그 의미가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명실상부한 최강대국임을 만방에 선포한데 있다. 이는 곧 오랫동안 계속되어온 유럽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대신 미국이 세계정치의 중심에 서게 되었음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이었다.